연휴의 마지막 날. 이대로 지나다간 집에서 뒹굴뒹굴 시간을 모두 날려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 졸린 눈을 부비며 동생을 꼬드겨 냈다. 오랜만에 호면당을 들러 좋아하던 파스타를 먹었으나 옛날 같지 않은 맛. 섭섭한 기분.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쇼핑을하고 몇 달 동안 손질없이 길러댔던 긴 머리를 잘라냈다.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보며 북경 뒷골목에서 내가 느꼈던 기분을 저들도 느끼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약속이 있다는 동생을 버스 태워 보낸 뒤 오랜만에 삼청동으로 향하다.
내가 좋아하던 그 길은 여전히 그대로. 돌담도 그대로, 녹음도 그대로, 막히는 차들도 그대로. 북적이는 인파를 보며 이젠 한적하던 분위기가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 연등들을 바라보며 석가탄신일이 언제인가 잠깐 생각해보니 다음 주말도 또 연휴라는 생각에 잠시 기분이 업되다.
오랜만에 찾는 오로. 혼자 터벅터벅 찾을 수 있는 카페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반갑게 맞아주는 얼굴들. 변함없이 유쾌한 인사에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따스한 햇살을 피해 한적한 분위기는 이곳으로 숨어들어 있었군.
작고 아담한 곳. 제대로 향을 뽑아내는 핸드드립 커피들. 하얀 테이블. 탁자 위에 놓여진 꽃들.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카페 안에는 노부부들도 두세 쌍 다녀간다. 주인장과 커피의 향과 맛에 대해 얘기하고는 웃는 얼굴로 카페를 나서는 노부부를 보며 연휴의 마지막 햇살과 비슷하다는 느낌. 따스하고 아련하다. 어느새 손님들이 몰려들고 복작복작 정신이 없어진다. 책을 꺼내 펼친다.
한적한 이곳까지 스며들어온 따스한 햇살 덕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원두는 페루산 유기농 원두라는 설명. 시럽을 넣지 않아도 좋았다. 차갑지만 향이 충분히 느껴지는 커피. 새삼 이 곳의 커피가 괜찮다고 속으로 평해본다.
커피와 마주 앉아 카메라를 만지작 만지작. 어느덧 커피가 반 이상 줄어들었다. 소설 속의 남과 여는 맥주 여러 병과 안동 소주를 섞어 마시고는 걸어서 가게 문을 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다녀간 조그만 술집은 모든 안주가 이만원. 하지만 그녀는 제육과 해물을 반씩 섞어달라고 하고는 이만 오천원에 흥정을 성공. 그녀의 실연 얘기에 오히려 남자가 실연의 상처를 치료받는 이야기. 한 때 사랑했던 남녀. 다만 시간이 어긋났을 뿐.
남녀가 각자 헤어져 걸어가자 다음 단편이 시작된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 현수는 남자였을까 여자였을까. 하지만 이내 여자라고 결론 내린다. 남자여서는 안된다. 그들의 순진하고 혼란스러웠던 대학시절. 겨우 한 살이 많았던 선배들에게 모든 걸 의지하던 이야기. 그래서 그 형은 어떻게 지낸데? 몰라. 나도 몰라. 정말 몰라. 보험가입증서를 만지작 거리며 그렇게 살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그녀. 글라스의 얼음들이 녹아간다.
소설을 덮으니 다시 오로. 정말 희안하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니까. 조금 전만해도 그렇게 정신없이 몰려 들더니 말야. 누나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 다시 한적해졌다. 정말 희안하다. 밀물처럼 몰려온다. 하지만 왜 썰물처럼 빠지지는 않을까. 머리 속으로, 가슴 속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었던 녀석들은 도무지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자리에서 가만히 잊혀지기만을 기다린다.
이제 저녁 시간이잖아요. 밥 먹고 나면 다시 사람들이 좀 들어오겠죠. 그래도 오늘은 연휴 마지막 날이라 와인 찾는 손님들은 별로 없을 수도 있겠네요. 생각해보니 정말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슬슬 배도 고파온다.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날려본다. 아직 씻지도 않았다 나가기 귀찮다. 옹야. 메리 어린이날이다. 그래서 다시 고민 시작. 누군가를 불러내 볼까. 혼자 와인이나 마시면서 안주로 배를 채워볼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결론은 집에가서 따순 밥 먹는 게 여러모로 낫겠다는 생각.
그렇게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선다. 바로 몇 시간 전인데 벌써 며칠이 지난 것 같은 아련함. 일상에서 살짝 벗어났을 뿐인데 아주 멀리 다녀온 것 같은 아련함. 연휴 마지막 날의 따스한 햇살. 몸 구석구석에 살짝 남아 있는 꽃가루의 푸석거림이 그것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마지막 증거다. 곧 샤워를 마치고 나면 완전하게 다시 일상. 꽃가루의 푸석함보다 조금 더 푸석한 먼지와 매연을 닦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