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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zzoos 2008. 6. 1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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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Ensaio sobre a Cegueira)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정영목 | 해냄출판사

오랜만이다. 이렇게 집중해서 책을 읽은 것은. 가장 큰 이유는 사라마구의 필법때문일 것이다. 마침표를 제외한 거의 모든 문장부호를 생략했다. 문단 사이에 간격을 띄어주지도 않는다. 모든 대화는 누가 말했는지가 헷갈릴 정도로 따닥따닥 붙어있어서 집중하지 않으면 대화의 흐름을 놓치기 쉽다. 비슷한 느낌을 아멜리 노통브의 <시간의 옷>에서도 느낀 적이 있었는데, 그건 양반이다. 누가 한 말인지는 헷갈렸지만 최소한 따옴표로 하나의 대화를 묶어주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집중을 해야했기 때문에 피곤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정말 눈먼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그들의 감정에 훨씬 강하게 몰입될 수 있었다. 매우 두툼한 책(472쪽)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책을 읽는 동안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았다. 엄청난 필력이고, 묘사력이다.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

주제 사라마구는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199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아쉽게도 교보에는 품절). 돌이켜 생각해보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글을 읽어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아예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뭐랄까 무겁고 딱딱한 글들일 것만 같은 선입견이 있었다고 고백해야 겠다. 솔직히 난 좀 가벼운 소설들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정도의 응집력과 밀도있는 글이라면, 이 정도의 무게가 있는 글이라면, 이만큼 재밌는 글이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아무래도 이 책을 계기로 그 동안 좀 멀리했던 무거운 글들이나 고전 문학들을 읽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얘기가 너무 멀리 샜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정말 눈이 먼 사람들이 모인 도시의 얘기다. 아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다. 그리고 눈이 보이는 딱 한 명의 여자. 인간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추악하고, 더러울 수 있는 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묘사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단지 '눈'이 보이지 않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를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사라져버리는 상황. 집단적인 광기가 모두를 지배해버린 도시. 그 곳에서 눈이 보이는 여자는 한 무리를 이끌고 살아 남아 진정한 인간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정말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꼭 읽어보시길. 내가 남미의 환상적 리얼리즘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마르케스나 보르헤스의 글을 읽은지도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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