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1일. 그러니까 2008년의 마지막 날. 애인도 없고, 머릿 속은 심난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새해를 맞이해보고 싶었어요. 마침 싼 전세기가 하나 나와있다고 하길래 낼름 잡아타고는 기타큐슈 공항으로 날랐습니다. 2박 3일 동안 일본의 신년을 보고 왔어요.
사진을 많이 찍기는 했는데, 제대로 찍은 사진은 없네요. 그래도 추억을 정리해보고자 막 올립니다. 사진 압박이 심하겠네요. 겨우 2박 3일인데 몇 개의 포스팅이 될 지. 일단 하루치만 정리해봤는데도 대략 4개의 포스팅이 될 듯. 자! 그럼 출발!
#1 도망치듯 떠나다
전세기의 출발 시각은 오전 7:30. 인천발 기타큐슈행 제주항공 7C2683편. 좀 넉넉하게 공항에 가기 위해 공항버스 첫차(두 번째 차던가?)에 탑승. 새벽에 일어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버스 운행 시각을 알아보기 위해서 120 다산 콜센터에 전화도 했다구요.
차가 막히지 않으니 엄청 빨리 공항까지 달리더군요. 사람이 없는 새벽의 인천 공항. 1등으로 도착해서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담배도 한 대. 기타큐슈는 일본의 남쪽이라 (제주도와 비슷한 위도) 따뜻할 거라고 생각해서 옷을 얇게 입었더니 좀 춥네요.
모여야 하는 인원은 총 9명. 워낙 여행통이신 찌롸니 형님과 그의 추종자(?) 8명. 새해를 맞이하러 키타큐슈로 뜹니다. 원래는 일본 승객들을 제주로 나르기 위한 전세기인데 한국에서 들어갈 때 비워서 가면 손해잖아요? 그래서 엄청 싼 가격으로 나온 표를 잡았지요.
이번이 일본에는 두 번째. 두 번째인데 처음보다 설레이는 건 두려움이나 긴장이 없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순수하게 여행에 대한 기대만으로 들떠있었다고 할까요. 한편으로는 고민거리와 스트레스를 한짐 가득 짊어진 상태. 사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겁니다. 그대로 새해를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고 할까요. 어쨌든 여러모로 지난 번의 일본행과는 많이 다른 여행의 시작. 해결되지 못할 고민과 가득한 스트레스를 그곳에 버리고 올 수 있을까요. 문득 수첩에 이런저런 메모를 하다가 손톱을 보니 한참 길어있더군요. 수첩의 귀퉁이에 한 문장 더 적어 넣습니다. "길어진 손톱을 깎아버릴 손톱깎기 구입".
기타큐슈 공항까지는 대략 두 시간 정도. 이제 날이 어스름해 집니다. 공항에 내리면서 우리가 타고 날아온 비행기를 한 번 찍어주고요. 전세기라서 기내식이나 신문같은 서비스는 전혀 없습니다.
키타큐슈 공항입니다. 그리 큰 공항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깔끔한 곳입니다. 왠지 모르게 여행을 다닐 때에는 이런 문구를 꼭 찍어놓게 되요. 사실 이런 문구를 봐야 '아, 내가 이제 다른 도시에 왔구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공항 입구 바로 옆에 메텔이 서 있더군요. 물어보니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인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가 후쿠오카현 구루메(久留米)에서 태어났고, 전쟁 이후에는 고쿠라(小倉)에서 학교를 다녔다네요. 관련 관광 상품이 있는 것 같았어요. 자세하게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바로 (마츠모토 레이지가 학교를 다녔다는) 고쿠라(小倉). 고쿠라베이 호텔입니다.우선 고쿠라 역까지 버스로 이동. 버스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바람에 버스를 하나 놓쳤어요. 그래서 일행이 둘로 갈라지는 사태 발생. 하지만 큰 사고 없이 고쿠라 역에서 모두 만날 수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정도의 거리였던 듯.
일단 호텔로 가서 짐을 풀었습니다. 호텔 바로 앞은 위에 보이는 것처럼 바다가 보이는 곳. 왼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더 넓은 바다가 보입니다. 고쿠라는 그다지 크거나 번화한 도시는 아니었어요. 아, 물론 고쿠라 역은 꽤 큽니다만.
고쿠라 역 아케이드. 표지판이 재밌더라고요. 뭔가 명확하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달까요.
고쿠라 역의 쇼핑몰 식당가에서 간단한 부페로 첫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대단히 맛있는 음식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전체적인 질이 떨어지는 수준은 아닌 식사. 과식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소화가 안되서 고생을 좀 했습니다. 원래 소식하는 편인데 이날 따라 왜 그랬지.
식사를 하고 나와서는 고쿠라성을 보러 갔습니다. 이동 방법은 100엔 버스. 일종의 순환 버스입니다. 원래 일본의 버스 노선은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달라지는 방식인데요(우리 나라 버스도 그렇죠). 100엔 버스는 요금 100엔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버스입니다. 단, 그 노선이 좀 짧고 계속 순환하는 노선이더군요.
버스 내부의 풍경은 우리네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크게 다른 점 한 가지. 버스 기사님이 신호에 정차할 때마다 시동을 끕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할 때 시동을 켜고요. 어딘가에서 들은 바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더 좋다고 하네요. 하지만 확실한 얘기는 아니니 일단 패스;;
고쿠라 성이 보이죠. 왠지 저 많은 나무들이 모두 벚나무일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봄에 아주 멋진 경치를 보여주겠네요. 그러고보면 일본의 성(城)은 처음 가보는 거예요.
고쿠라 성입니다.
좀 다른 각도로도 하나.
하지만 영 마음에 드는 사진은 건지지 못했네요. 뭐랄까 다음엔 혼자 여행하고 싶어진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같이 다니면
재밌지만, 혼자 다닐 때의 자유로움과는 좀 거리가 멀어지니까요. 사진을 찍을 땐 좀더 여유롭게 찍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우리네 기와나 처마와는 다른 분위기.
고쿠라 성에는 박물관(?)과 일본식 정원이 있습니다. 성(박물관)을 관람하는 데에는 350엔, 일본식 정원을 관람하는 데에는
300엔입니다. 그리고 둘을 모두 볼 수 있는 티켓도 있었는데 가격이 기억 안나네요. 600엔이었던 것 같은데.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모두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전 정원을 보고 싶었지만, 겨울이라 그다지 볼 게 없다는 얘기를 듣고는 다른 분들과 함께 성 내부를 관람했습니다.
들어가자 마자 눈길을 끄는 미니어쳐. 디오라마라고 해야되나요?
그 시대의 풍습을 자세하게, 정말 작은 것까지 표현해둔 아주 대규모의 모형입니다. 구석구석 살펴보기 위한 망원경도 준비되어 있을 정도.
이건 반대편에서 바라본 모형. 정말 아주 꼼꼼하고 재밌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구석에 숨어서 몰래 쉬고있는 사람들까지 다 표현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장군의 갑옷이라던가, 각종 문화재 등 여러 가지가 전시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양이 그리 많지는 않더군요. 또 각종 체험학습을 할 수 있는 기기들이 많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뭔지 알 수 없더라고요. 전체적으로 작은 규모의 전시관이었지만, 세밀한 부분에 신경쓰는 그들의 문화가 다시 느껴졌습니다.
성의 꼭대기에는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쿠라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어요.
그러다가 기와 끝. 그러니까 수막새 부분인가요? 그 근처에 재미난 것을 발견. 꼭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것 같은 귀여운 얼굴의 인면어(人面魚)가 있네요.
전체적으로 고쿠라는 참 얌전한 도시라는 기분이었습니다. 아주 이상한 비유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주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아니면 좀더 작은 도시와 비교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항구 도시와 비교해야 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잔잔한 느낌와 번잡하지 않은 느낌이 웬지 비슷했어요.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고쿠라 역으로 돌아왔습니다. 고쿠라 역에는 모노레일이 다닙니다. 난생 처음 봤어요. 모노 레일. 이 사진 찍느라(모노레일이 역에서 나오는 장면) 일행들 잃어버릴뻔 했습니다.
아, 이 사진 보시면 사람들이 많이 움츠리고 있지요? 아까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큐슈가 많이 남쪽이라 따뜻할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제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았고. 그래서 옷을 매우 얇게 가져갔는데, 실제로 엄청난 바람과 함께 평년 기온을 훨씬 밑도는 기온! 정말 무지 추웠습니다. 서울보다 더 추웠어요. 감기 안 걸린게 천만 다행!
고쿠라 역에서 간단한 쇼핑을 했습니다. 100엔 샵 구경도 하고, 오늘 밤에 마실 와인도 좀 사고요. 심지어 샴페인 잔까지 인원수에 맞춰 준비했죠. 네, 만반의 준비가 있어야 즐거움은 배가 되니까요.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코쿠라베이 호텔 다이이치 203호. 작지만 있을 건 모두 갖춘 편안한 싱글룸입니다. 그러고보니 비즈니스 호텔은 처음이네요. 지난 번 여행에선 너무 호사스럽게 지냈었죠.
이제 짐을 풀어두고, 씻고나면 2008년을 보내고 2009년을 맞이하는 카운트 다운을 위해 모지코(門司港)로 가야 합니다. 잠시 녹차를 한 잔 데우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그 동안의 일을 수첩에 정리합니다.
잘 모르겠다. 웃고 떠들기보다는 섞이지 않고 혼자 거닐고 싶다. 그러다가 우울이 훅~ 찾아오면 큰일인데... 여기에서나 거기에서나 우울한 연말인 것은 마찬가지일까.
기대해보자. 오늘 밤의 카운트 다운. 우울함을 날려줄 만큼의 거대한 즐거움이 찾아오길. 그런 멋진 새 세상을 여는 카운트 다운이길.
고쿠라. 하코다테보다는 큰 도시 같지만 느낌은 약하다. 일본이라는 느낌이 없다. 풍경도, 거리도, 사람들도. 그러고보면 나에게 '일본스럽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