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바짝 말라버려서 조그마한 일에도 뾰족한 가시에 찔린 듯 푸석푸석 찢겨져 나가는 것만 같은 요즈음. 주말 내내 드라마와 만화에 묻혀 있다가 지난 주에 하다 말았던 사진 정리를 다시 시작. 거의 다 끝난 줄 알았던 2009년의 사진들은 아직도 엄청난 양이 남아 있었다.
2009년 4월, 그러니까 봄이 오는 것 같았지만 꽃샘추위 덕에 여전히 춥던 4월의 첫째 주와 둘째 주에는 변산 반도와 목포에, 혼자 여행을 갔었다. 혼자 가는 여행이라 오랜만에 사진을 잔뜩 찍어보자 싶기도 했고, 새로 구입한 Rollei 35SE의 테스트도 겸하는 여행이라 가방에는 Leica D-LUX3, Nikon FM2(렌즈는 24mm, 50mm, 100mm), Rollei 35SE 이렇게 세 종류의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덕분에 약 2년이 지난 지금 어떤 컷이 어떤 필름이었는지, 어떤 카메라였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D-LUX3로 찍은 컷들은 EXIF 데이터가 남아 있으니 큰 문제가 없지만 말이다.
찬찬히 더듬어 보면 Fuji Reala 100과 TMAX 400(+2 증감) 정도의 필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각각의 컷들이 어떤 카메라였는지, 어떤 필름이었는지는 아주 희미한 기억 뿐. 그냥 그런 것들은 접어두고 사진을 정리해두는 것에만 의의를 두기로 했다.
사진을 정리할 때 주로 시간 순서대로, 여행의 기억을 그대로 남기기 위해 노력했었지만 이번에는 카메라가 여러 대이다 보니 스캔 순서도 뒤죽박죽이 되어버려서 지금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분류하고 정리했다. 아직 몇 개의 시리즈가 더 올라가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혼자 걸으면서 '길'에서 찍은 사진들을 첫 번째 묶음으로 정했다. 그럼, 스크롤의 압박을 견딜 수 있다면 아래를 클릭.
단란했었는지 화목했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혼자 걷다보니 앞서 걸어가는 가족의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짠하게 다가왔다. 그래, 아마 롤라이로 찍었을 거다. 작은 필름 카메라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의 몰카도 부담이 없다.
김제역이겠지. 내소사를 가기 위해 KTX를 타고 김제로 향했으니까. 처음 가보는 역이었을 거다. 아직 여행은 시작중.
내소사를 가기 위해서는 김제에서 부안으로 시외버스를 타야한다. 김제 시외버스 터미널을 찾아 걸어다녔다. 조금만 기차를 타고 내려가면, 조금만 버스를 타고 내려가면 그곳은 여전히 시골이다. 어릴적에 봤겠지만, 이젠 기억이 가물한 것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한적한 거리. 차도 그다지 다니지 않는다. 설렁설렁 걷긴 하지만, 솔직히 어딘가 모르게 긴장됐다. 처음, 혼자, 가는 길.
부안 터미널. 내가 구경하고 싶은 곳은 내소사와 채석강. 벽에 붙어있는 관광 안내도를 보고, 버스 시간표를 체크하고 노선을 정리했다. 출발 전에 미리미리 계획을 짜놓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인 걸.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혼자의 묘미. 결국 정리한 노선은 부안 - 곰소 - 내소사 - 채석강 - 부안으로 돌아오는 코스. 이미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표는 예약해 둔 상태.
기차역의 풍경보다 터미널의 풍경이 조금 더 정겹다.
먼 길(?) 떠나기 위해 식수를 보충하다가.
터미널 옆에서 재미난 장면 포착. 제목은 <가발> 정도로 해둘까.
맞는지 모르겠다. 곰소행 시외버스. 참고로 곰소는 젓갈과 염전으로 유명한 곳. 여유있게 돌아보려 했다면 곰소에서 젓갈 정식을 먹을 시간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곰소에서는 다시 내소사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야한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한적한 동네를 구경.
김제나 부안보다 훨씬 더 작은 동네.
꽤나 큰 한의원이 있다. 바로 한의원 건너편이 버스 승차장.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딱 나 혼자다. 혼자 여행하다보니 트레블러스 노트에 꽤나 자세히 이것저것 노트해놨는데, 펼쳐보니 한 시간에 두 대가 들어 온다고 적혀 있다.
약 30분의 시간을 함께 기다려준 터미널 옆 구멍가게의 발바리. 수첩을 보니 오후 두 시가 살짝 넘은 시각. 기분 좋은 햇살을 받으며 늘어져 있었다.
14:19 곰소 터미널 수창당 한의원 건너편 버스 정류소
연고지도 없는 먼 땅에서 한 시간에 두 대 온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아직 내소사가 아니라니, 멀긴 멀구나. 하지만 약간의 긴장과 여유로움, 묘한 설레임. 오랜만이거나 처음이다. 이런 기분.
익산에 있는 호준이와 통화했다. 오늘 밤 기차표는 환불하고 익산에 들러야겠다.
다리 사이로 누렁이가 어슬렁 지나간다. 따사로운 햇살. 여유로운 시간.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휴일 오후 두 시의 버스 풍경은 어디나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창 밖을 보면서, '참 기분 좋다. 자주 떠나야 겠다'라고 생각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익산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결국 채석강을 보고 나서 익산으로 가기로 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표는 역에 가서 환불하기로 결심. 뭐, 혼자니까, 여행이니까.
내소사를 구경하고 내려와서 채석강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전국 일주를 하는지 혼자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잠깐 쉬는 학생도 보였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도 보였다. 새로 산 등산복을 뽐내는 아줌마 아저씨들도.
15:28 내소사 대장금 촬영 연못
아, 내소사의 대웅전. 1633년에 지었다는 이 건물은 그 동안 봐왔던 그 어떤 고건축보다 감동적이다. 문살과 공포, 그 모엇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백제시대(633년) 창궐한 내소사. 천년 사찰답다.
전나무길. 대웅전. 대웅전으로 끌어가는 동선...
이제 채석강으로 가야겠다. 과연 낙조를 볼 수 있으려나.
15:51 내소사 버스 정류소
버스를 기다리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 듯한 청년을 보다. 얼굴엔 피곤함이 묻어 있었지만 스트레칭을 하더니 짐을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전국 일주? 그 용감함이 내심 부럽다.
솔직히 자전거로는 자신 없다. 그래서 면허를 땄지만... 이젠 운전도 자신 없다.
다시 김제역?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익산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었을까... 솔직히 혼자 걷다 보니 술친구가 필요해졌었다.
어두워지니 점점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
흔들 흔들...
하지만 결국은, 다시 돌아온다.
언젠가 또 떠나야지, 결심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방콕.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당장 다음 주라도 훌쩍 다녀올까? 싶지만 다음 주는 설날이구나, 어영부영하다보면 2009년 4월 첫째 주에 다녀왔던 내소사를 정확하게 2년 만에 다시 가게 될 지도 모르겠는걸?
아, 마지막으로. 쭉 살펴보니 강아지를 찍은 컬러 컷과, 포스팅의 대표 사진으로 올려둔 가시나무 사진(컬러였는데 흑백으로 변환한 듯)을 제외하고는 모두 Rollei 35SE로 찍은 것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