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무라카미 하루키 | 양억관 | 민음사
책을 꺼내 읽은 것도, 하루키의 장편을 읽은 것도 오랜만이다. 길고 길었던 '책을 못 읽는 시기'를 끝내기 위해 하루키의 신작을 집어든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리고 그 의도는 명쾌하게 적중해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빨강(あか, 赤), 파랑(あお, 青), 검정(くろ, 黒), 하양(しろ, 白)의 친구들 사이에서 색채가 없는 쓰쿠루(つくる, 作る) - 그의 이름이 형용사가 아닌 동사라는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지 않을까 - 가 이유를 모른 채 쫓겨나고, 민트색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연상의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 덮어 두었던 과거의 일을 되짚으며 자신을 되찾는 순례의 길에 대한 이야기.
두 개의 시간에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전작들처럼 굳이 챕터를 반복하면서 서술하지 않아도 흐름을 잘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세련됐다. - 챕터를 왕복하며 두 개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연습(?)은 이미 <세계의 끝과 하드 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시작됐고, 이제는 완숙하다고 생각했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훨씬 세련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법을 발견하고, 글을 통해 다양한 이미지(특히나 이번에는 색채)를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글을 읽는 내내 다음 소설을 위한 연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혹시 이 소설은 <1Q84>의 여주인공에게 아오마메(あおまめ, 青豆)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최소한 방향이라거나 아이디어 같은 면에서)
다분히 하루키스럽고(당연하게도!), 잘 읽히고, 풍성한 색채가 느껴지는 글 자체도 좋았지만, 다음 번 소설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는 점에서도 '역시!!'라는 느낌.
우연한 술자리에서 이 책의 판권을 구입하기 위한 권리금(?)의 규모에 대해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고, 약간은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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