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수 있으면 포스팅에 사진을 최소한 하나씩 붙여두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번 포스팅에는 어떤 사진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포스팅을 반말로 해야할 지 존대말로 해야할 지도 고민이 되더군요. 제목도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 도통 적절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11년 만에 백수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11년을 꽉 채웠더군요(정확하게는 6/1에 11년이 꽉 차기 때문에 18일 정도가 부족합니다만). 자주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긴 한데, 이렇게까지 오래 다닐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게임 회사 취직을 준비하고 있던 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일을 시작하게 됐었거든요. 대학을 졸업하고 30대 초반까지 건축 설계 사무실, 인쇄물 디자인과 웹 디자인, 전문 월간지 기자 등의 일을 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다양한 분야의 일을 했었죠. 그러다가 프리랜서랍시고 명함을 파놓고는 사실상 백수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수가 처음은 아니네요.
11년 동안 2개의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2006년 처음 입사했던 곳은 스타트업이라고 부를만한 곳이었죠. 여덟 번째 사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사번이 8번이었던 듯?). 전작을 크게 성공시킨 친구들이 창업한 회사였는데, 우연히 기회가 닿아 준비하고 있던 회사와 전혀 다른 분야였음에도 일을 시작했죠. 사실 당시에는 '일'을 빨리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출퇴근을 하고 싶었죠. 프리랜서 명함을 달았지만 실제로 일은 거의 없었고, 백수에 가까웠죠. 핸드폰 요금을 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만 믿고 살고 있었는데, 그게 무너지고 있었죠. 뭔가 했어야 했습니다.
컴퓨터를 다루는 일은 익숙한 일이었고(초등학교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했었고, 컴퓨터 잡지에서도 에디터로 일했었거든요), 게임도 좋아했으나 실제로 만드는 일은 처음이었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사실 프로그래머로 일할 수는 없었기에 기획자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력있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서 많이 배웠죠. 소수정예(?)로 일하다보니 다양한 영역의 일을 해야 했고, 그만큼 빠르게 업무에 익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시나리오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퀘스트 시스템을 만들고, 퀘스트 데이터 구조를 만들다가 업무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각종 시스템 구축, 실제 데이터 구현 등 컨텐츠 기획자가 해야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일을 진행했습니다. 초기에는 기획자가 두 명이었는데, 팀장은 전투 및 밸런스 저는 컨텐츠, 뭐 그런 식이었죠. 2년 여의 개발 기간을 거쳐 런칭했고, 라이브 단계로 접어 들었는데, 기대했던 것 만큼의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이후 기획팀장을 맡기도 했는데, 제가 팀장을 하던 당시는 리소스 투입을 최소한으로 한 채 라이브를 근근히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넥슨에서 우리 회사를 합병(?)했습니다.
인사 기록을 살펴보면 정확한 년도를 알 수 있을텐데, 이미 퇴사한 이후라... 아마도 2010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눈이 엄청 많이 왔던, 2월 1일 선릉으로 출근했던 기억입니다. 기존 회사의 창업 멤버들을 불러 넥슨에서 준비하고 있던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하기 위한 합병이었습니다. 저도 얼떨결에 같은 프로젝트에 투입됐습니다. 기획자로 합류했고, 두 번째 프로젝트가 시작된 거죠.
신기했습니다. 처음엔 백수가 지겹고 '출퇴근'이 하고 싶어서 우연히 기회가 주어진 일을 시작했는데, 그 우연이라는 것이 계속 되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가, 무언가가 나를 드라이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일이 지겨워질 때마다 뭔가 새로운 임무(?)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처음엔 첫 번째 프로젝트와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시나리오, 콘텐츠 디자인, 콘텐츠 시스템 기획, ... 그러다가 다시 회사 생활이 지겨워질 때 즈음 게임의 특징으로 레벨 디자인이 중요해졌고, 해당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회사 생활의 위기를 또 한 차례 넘길 수 있었죠.
결국 두 번째 프로젝트가 엄청난 기대 속에서 런칭하고, 런칭 이후... 큰 성과를 보이진 못했습니다. 라이브에 돌입하면서 뭔가 김이 빠진 것 같은 생활도 시작됐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을 때 중국 서비스 준비를 시작했죠. 다시 새로운 업무가 주어진 겁니다. 꽤 자주, 회사를 관두려 했었지만 뭔가 새로운 일들이 계속 생겼습니다. 넥슨에 합병 될 즈음에도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많았죠. 오죽하면 회사 사람들은 제가 회사를 관둘 거라는 말을 믿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라.
새로운 업무와 기회만은 아니었습니다.
게임 개발이 아닌 다른 일을 하려면, 일단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알아야지.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준비를 모두 마친 다음 회사를 관두는 것이 좋을 거야. 다음 달 카드 값은 어떻게 메꾸지? 퇴근하고 맛있는 소고기 한 점, 와인 한 잔, 몰트 한 잔, ... 이걸 포기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도 발목을 잡는 이유들이었습니다. 현실적인 고민들이었죠.
어느덧 회사 생활에, 월급을 받으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30대가 지나가고 40대가 되었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40대 게임 개발자라면 모두 생각해봤을 겁니다. 과연 내가 이 일을 몇 살까지 할 수 있을까? 초기에 창업해서 성공한 개발자들 외에 여전히 월급 받으며 묵묵히(?) 일하는 50대 개발자를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인맥이 좁아서일수도 있겠죠. 해외의 사례를 찾아보면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해외는 해외잖아요. 그리고 '기술'을 가진 프로그래머나 디자이너는 바로 그 '기술'이 무기일 수 있으나, 기획자의 현실은 또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냥 익숙해지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뭐 위기의식 같은 걸 느낀 건 아닙니다. 인생을 그리 심각하게 사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준비는 해야 했습니다. 마흔 셋. 조만간 마흔 다섯이 되고 금방 쉰이 되겠죠. 정년 퇴직할 때까지 게임 업계에서 일할 수 있겠다는 확신 - 그 확신은 스스로의 준비일 수도 있고 주변 환경을 파악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 을 가지거나, 뭔가 새로운 걸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그리 쉽게 떠오를 리 없겠죠. 그리고 어떤 일이든 과연 '확신'이라는 것을 쉽게 가질 수 있을까요. 결국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럼 난 뭘 하고 싶지?
근데 솔직히 말해서 뭐 하고 싶은지 모르겠더라고요. 사진 찍는 거 좋아하고, 글 쓰는 거 좋아하고. 여행 다니는 거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이랑 술 마시는 거 좋아하고. 음악 듣는 거 좋아하고... 이런 거야 한참을 얘기할 수 있지만, 남은 40년 이상을 뭐 하고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이 들진 않았습니다. 여전히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머리를 비워보기로 했습니다.
당분간 미래에 대한 생각보다는 오로지 현재만을 바라보고, 돈 버는 생각 같은 거 안 하고, 진짜 얼마 안 되는 남은 돈으로 여행 다니면서 머리를 비워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머리에 뭔가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생기진 않을까요. 결국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죠. 아니면 정말 땡전 한 푼 없는 노숙자가 될 수도 있고요. 그래도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내가 뭘 하고 살고 싶은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본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이예요.
또 모르죠, 여행 중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제 인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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