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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G 매거진 2004.12 (vol.201) 기고했던 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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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G 매거진 2004.12 (vol.201) 기고했던 글

zzoos 2018.10.26 03:12

참 오래전 일이다.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할 때의 일이니까. 당시 KT&G 사보를 만드는 곳에서 와인과 관련된 글을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기고를 했던 적이 있었다. 2004년이니까 14년 전이구나. 책장에서 삐죽 튀어 나와 있는 작은 책자를 다시 꽂아 넣다가 '이건 무슨 책자지?'하고 보니까 바로 그 글이 실렸던 책자. 예전에 썼던 글을 디지털 아카이빙해두는 차원에서 남겨둔다.


'극과 극'에 대한 얘기를 쓰는 코너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와인의 극과 극'에 대해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었기에... 그래서 뭐 나름대로 글을 써봤었다...



체험 ! 극과 극


농밀하거나 혹은 경쾌하거나


와인을 즐기는 두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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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마고. 빈티지에 따라 수 백만원을 호가하는 여성적인 와인의 대명사. 테이블에 놓인 병의 레이블을 확인하는 순간 동공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그녀를 잠재우고 있던 코르크가 뽑히는 순간, 그녀는 눈을 떴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태양을 숨긴 죄로 어둠 속에서 끝없이 기다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수인(囚人)'과의 만남이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고, 기지개를 켜고, 눈을 부비고, 주위를 둘러본다. 수줍음의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향을 뿜어내기 시작할 때, 그녀는 자신 속에 숨겨놓은 태양을 꺼내고, 우리는 태양을 잔에 담는다.


먼저 눈으로 그 빛을 응시하고, 코로 향의 만찬을 포식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전희(前戱)를 충분히 즐겨야 절정의 순간 또한 아름다운 것. 눈과 코로 충분히 빛과 향의 협연을 감상하면 서서히 혀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1982년. 머나먼 이국의 포도밭에서 까베르네 쏘비뇽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수확되는 순간부터 그녀와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형벌이 끝나고 나의 기다림이 끝나는 이 순간. 부드럽고도 경쾌한 첫 느낌이 혀끝으로부터 전해 온다. 혀의 곳곳에서 그녀의 느낌을 기다리고 있다. 돌기와 돌기 사이, 그녀의 느낌이 전해진다. 우아한 자취가 나를 천국으로 이끈다. 체온으로 살짝 덥혀진 그녀는 두 번째 향기를 입 안에서 뿜어낸다. 기품과 고결함이 느껴지는 향이다. 끝으로 목을 넘어가며 마지막 향을 남겨둔다. 여성스럽지만 강직한 느낌이다. 이별의 아쉬움인지 마지막 향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레이블을 찬찬히 살펴본다. 샤토 마고. 영화 <실락원>에서 린코와 구키가 마지막 순간에 독약을 섞어 마시는 와인. 잃어버렸던 낙원의 맛이었을 것이다. 나는 살아있기로 한다.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일곱 잔의 낙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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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미술관 앞 길. 겨울이라 해가 짧기도 하다. 퇴근하고 부리나케 달려왔는데도 이미 사방은 캄캄하다. 위잉. 핸드폰의 진동. 잊지 말고 와인 한 병 지참이다. 먼저 도착한 친구 녀석의 확인 전화. 물론 알고 있다구! 참, 올 때 담배랑 음료수 좀 사와라. 근처에 가게가 없네. 야!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달린다. 손에는 오늘 마실 와인 한 병이 들려있다. 골목 입구에 있던 편의점에서 지폐 한 장으로 해결한 것. 요즘엔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도 꽤 많은 종류의 와인을 찾을 수 있다. '와인은 비싼 것'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자꾸 비싼 와인들이 늘어가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잘 찾아보면 역시 가격대 성능비가 좋은 녀석은 있기 마련. 시간이 충분했다면 대형 할인 마트에서 훨씬 싼 녀석을 두세 병 살 수도 있었을 꺼다.


모임의 주제? 그런 건 없다. 딱히 말을 만들어 보자면 '싸고 건강하게 술 마시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정기모임'이라고나 할까? 확실히 밖에서 마시는 것보다 집에서 마시는 것이 싸다. 대신 식사와 안주를 준비해야 하는 사람의 고충이 따르기는 하지만. 그런 면에서 요리에 취미가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어찌 보면 그 덕분에 이 모임이 꾸준히 지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내 손에 담배와 음료수가 들려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와인보다도 먼저!) 모두 모여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서 오늘은 간단하게 라며 꺼내 놓은 볶음밥(나중에 알고 보니 리조또였다!)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자, 이제 속이 든든해 졌다면? 각자 준비해온 와인을 한 병씩 꺼낸다. 아직 월급이 바닥나지 않은 녀석은 와인 숍에서 조금 고가의 와인을 사오기도 하고, 나처럼 언제나 지갑이 저렴한 녀석들은 편의점산 와인이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안 된다. 크기가 제각각인 잔에 와인이 따라지고, 쨍~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면 어느새 이곳이 천국이다. 아주 가끔 술에 취하면 녀석들의 어깨에서 날개가 돋아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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