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난생 처음 카페리라는 커다란 배에 차를 실어야 하는 날. 전날부터 엄청 긴장하고 걱정해서 미리 도보로 여객터미널 답사까지 다녀왔다. 역시나 알람을 맞춰둔 시간보다 훨씬 일찍 눈이 떠졌고, 조금 더 뒹굴다가 부지런히 준비시작. 정각 7시에 정확하게 모텔에서 체크아웃했다.
7시부터 승선 시작이고 늦어도 7시 30분까지는 승선을 하라는 공지사항이 있었다. 일찍가면 배 깊숙한 곳에 차를 세우기 때문에 내릴 때 마지막에 내려야 한다는 조언들도 있었지만 그런 팁을 실천하기엔 불안함이 더 컸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 일단 빨리 가서 모든 걸 처리해두고 보자는 생각.
목포항 여객터미널 근처에 가면 '차량을 승선하는 곳'을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크게 크게 배치되어 있다. 그걸 따라서 쭉~ 들어가다 보니 차량 번호를 확인하는 분을 만났고, 예약완료 차량인 걸 확인한 다음 손짓으로 가야할 곳을 알려준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길로 샐 염려도 전혀 없고 그냥 안내해주시는 분들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커다란 배의 뒤쪽에 크게 열려있는 문. 그 아래에 놓인 커다란 철판들. 그걸 밟고 올라서면 이제 드디어 배에 올라타는 건가? 뭔가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사실 뭐 별 거 없이 그냥 쭉 들어가면 끝.
일찍 가면 깊숙한데 차를 세운다더니 너무 일찍 도착해서 그런가? 배에 올라서자마자 바로 오른편으로 인도해주신다. 주차에 익숙하지 않아서 걱정을 좀 했는데, 너무나 익숙하게 유도를 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아주 쉽게 주차까지 클리어.
차를 세우고 나면 위의 사진처럼 바퀴를 배 바닥에 고정하는 장치를 꽁꽁 묶어서 잠궈두신다. 배가 출항하면 차량이 선적된 곳으로 다시 내려올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짐들은 꼭 들고 내려야 한다. 아, 당연히 차 문은 잠궈둬야지.
이렇게 차량 선적이 끝나면 '선적 확인서'를 주신다. 이제 이걸 가지고 배에서 내린 다음 다시 여객터미널로 가서 여객들이 승선할 때 같이 승선하면 된다.
차를 먼저 배에 태워두고 내려서 커다란 산타루치노호를 찰칵. 한 번에 카메라에 모두 들어오지도 않는다. 정말 크다.
9시에 출발하는 배. 차량 승선은 7시 부터. 실제로 차를 싣고 여객터미널에 와서 시계를 보니 7시 30분 정도 됐다. 아마 부지런히 일찍 왔기 때문에 별로 밀리지 않고 빠르게 차를 실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위의 사진에서 왼쪽에 보이는 게 차량승선권. 화물함에 차가 실려있다는 뜻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 승선권. 처음 예매했던 표는 일반실이었는데 오늘 항해가 자그마치 다섯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1인실로 업그레이드해서 표를 끊었다. 참고로 예매할 때 현금으로 예매했더니 변경 발권을 할 때의 추가 요금도 현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정말 가지고 있던 현금을 탈탈 털어서 냈다. 하마터면 변경 못할 뻔. -0-
8시 10분 정도가 되니까 드디어 승선 시작. 배에 탑승한 다음 안내데스크로 가서 표를 보여드리면 1인실용 열쇠를 주신다(당연히 일반실은 그럴 필요 없다). 내 방이 어딘지 자세히 설명을 듣고 465호실에 입장. 정말 고시원처럼 작은 방이다. 침대와 작은 책상이 놓여 있다. 침대에 누우면 보이는 위치에 작은 TV가 놓여 있다. 아주 낡은 배지만 침구류는 깔끔했다.
짐을 모두 방에 놔두고 배를 구경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열쇠가 있으니 방문을 잠궈둘 수 있어서 짐 걱정이 없구나! 미처 생각지 못한 1인실의 장점.
파리바게트, 편의점 같은 것이 있어서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고, 오락실이나 휴게실 같은 것들도 있다. 흡연구역이 어디인지를 먼저 확인해두고 배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대단히 신기한 것은 없었는데, 참 컸다. 무지하게 컸다. 정말 큰 배였다.
드디어 출발. 목포항을 출발해 목포 내해를 달린다. 오랜만에 타는 배. 차까지 실을 수 있는 이런 큰 배는 처음이다. 그동안 타 본 가장 큰 배는 울릉도를 왕복하는 고속페리 정도.
커다란 배가 생각보다 빠르게 달린다는 것은 바람을 맞으며 느낄 수 있었다. 날씨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바다는 잔잔했다. 담배를 한 대 태우면서 바람과 바다를 구경하고, 파리바게트에서 빵을 사다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는 침대에 누워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TV는 한두 개 정도의 채널이 나오는데 SHARP 였나? 어쨌든 일본어만 적혀있는 일본제 TV다. 사실 그거 외에도 여기저기 일본어가 적혀있는 장비가 많은데 아마도 퇴역한 일본의 여객선이었을테니 당연한 일일 거라고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혼자 생각했다.
그렇게 약 네 시간 반의 항해. 드디어 제주항이 보인다. 날씨는 여전이 꾸물꾸물한 상태. 일기예보를 보니 며칠 동안 별로 날씨가 좋지 않을 예정인 듯.
하선하라는 방송이 안 나오길래 잠깐 다시 침대에 누웠는데 까무룩 잠이 들었나보다. 465호실 빨리 나와서 열쇠 반납하라는 방송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후다닥 달려가서 열쇠를 반납하고 차량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니 뒤로 돌아거 계단을 쭉 내려가면 된단다.
철제 계단을 계속 내려가서 문을 열었더니...
헐, 배 아래쪽은 이런 상황. 엄청나게 많은 차가 실려 있었고, 사이사이에 커다란 트럭들이 시야를 막고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모르겠다. 게다가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바닥 쪽에는 바퀴를 고정하는 로프(?)들이 계속 깔려 있어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걸려서 넘어질 수 있는 상황.
로프들을 피하기 위해 발을 무릎 높이까지 번쩍번쩍 들어가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보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아까 차를 세웠던 곳과 비슷한 느낌인 곳이 없고, 차를 찾을 수가 없어서 바퀴를 묶고 있는 로프를 푸는 작업을 하시는 분에게 "차를 못찾겠어요"라고 하소연했더니 "이 층에 세우신 거 맞아요?" "어? 다른 층도 있어요?" "네, 여기에 없으면 한 층 더 내려가 보세요"
아하! 차를 선적하는 곳이 한 층이 아니구나. 정말 큰 배구나! -0-
한 층을 더 내려갔더니 역시 그곳에도 차는 엄청 많다. 다시 발을 무릎까지 들어가면서 조심조심 걸어가보니 어! 저쪽인 것 같다! 싶은 곳이 있다. 캬~ 차를 발견하고는 정말 기뻤다. 정말이지 차량을 배에서 내리는 바로 문(?) 바로 앞이다. 게다가 내 앞의 차들은 이미 모두 하선했는지 내 차만 덩그러니 있는 상황. 차를 싣는 것보다 내리는 것이 더 오래 걸린다는 얘기를 들었었는데, 대단히 재수가 좋은 상황이다.
배에서 내린 다음에는 특별한 절차가 없었다. 항구를 벗어날 때 소독을 하는데, 사이드 미러에 묻은 약품 때문에 뒤가 뿌옇게 보이는 게 좀 불편했다.
약 두 시 정도에 배에서 내렸는데, 특별히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갑자기 검색해서 제주 시내 식당을 찾기도 귀찮아서 일단 숙소를 목적지로 넣었다. 보름의 일정. 에어비앤비에서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낸 곳. 해비치 해수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표선의 한적한 곳에 있는 숙소. 본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별채. 커다란 욕실과 부엌 그리고 3-4명도 충분히 잘 수 있을 커다란 방.
자그마치 15일이나 지낼 곳이니 나름 고르고 골라서 선택한 곳이다. 숙소 근처는 위의 사진처럼 모두 감귤밭. 아직은 초여름이라 아주 작은 열매들만 맺혀있는 키 작은 나무들.
숙소에 도착하니 일단 커피부터 한 잔 하자시며 작업실로 안내해주신다. 사진에서 왼쪽에 보이는 곳이 쥔장 아저씨의 작업실. 커피에 관심이 많으셔서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취득하셨다는 쥔장 아저씨는 대단히 익숙하고 솜씨좋게 커피를 내려주셨다. 나도 에스프레소 보다는 드립 커피를 더 좋아하는데, 오~ 기뻐라. 아저씨가 내려주신 블루마운틴은 신선했고, 밸런스가 좋았다.
나이도 젊지 않은 사람이 혼자서 15일이나 숙소를 예약하니 궁금하신 것이 많으셨는지 이런저런 얘기가 좀 길어졌다. 샤워를 하고나서 '드디어 제주에 왔다는 설렘'으로 객기를 부렸다. 숙소를 표선에 잡은 사람이 제주시에서 술을 마시고 올 생각을 하다니... 일단 쥔장님에게 표선 콜택시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표선에서 택시를 부를 때는 표선콜이 가장 편하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혹시 다른 지역에서(예를 들어 제주시나 서귀포시) 표선으로 돌아올 때 혹시라도 근처에 표선 택시가 있다면 저렴한 요금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저녁을 먹으러 제주시까지 택시를 타고 나와보니. 택시비가 3.5만원. 혹시라도 표선으로 돌아갈 때 제주시에 나와있는 표선 택시를 만날 수 있다면 2만원에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제주는 엄청 큰 섬이고, 숙소와 먼 지역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교훈을 첫 날 얻을 수 있었다. -0-
저녁을 먹으러 방문한 곳은 올 댓 제주(구글맵 링크). 지인이 제주로 내려가서 오픈한지 몇 년 된 집이다. 나는 첫 번째 방문. 역시는 역시다. 좋았다.
자세한 방문기는 별도의 포스팅으로.
정말이지 배가 너무 빵빵해질 정도로, 긴 시간에 거쳐 마셨다. 오랜만에 수다도 떨 수 있었다. 혼자서 술 마신 시간이 벌써 2주 ㅠㅜ 신나게 먹고 마시고는 표선 콜택시에 전화를 해봤으나 그 시간에는 제주시에 표선 택시가 없었다. 그래서 카카오 택시를 불렀더니 금방 배차가 됐는데, 기사님께 여쭤보니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표선을 가는 손님이 있다고. ㅋㅋㅋ
숙소에 돌아와서 좀 씻고 나왔더니 쥔장 아주머니께서 인사하러 오셨다. 다시 작업실로 가서 수박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 쥔장 아주머니는 숙소를 이용하면서 주의해야 하는 점들을 알려주셨다.
모든 얘기가 끝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제주에 도착했다는 설렘과 함께 아드벡 코리브레칸을 오픈. 혼자서 괜히 배시시 실실 웃으면서 몰트를 한두잔 마시고서야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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