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숙소에서 푹 자고 일어났더니 컨디션이 매우 좋은 상태. 심지어 어제는 술도 거의 안 마셨으니 (둘이서 사케 500ml 한 병) 해장할 꺼리도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지만 딱히 가보고 싶은 곳도 없어서(이미 많이 돌아다녔다) TV를 보면서 뒹굴거렸다. 사실 여행을 다니면서 이렇게 숙소에 뒹굴거리는 건 일정이 충분히 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슬슬 점심을 먹어야 하는 시간. 지도를 펼쳐보니 숙소 근처에 제주 국수 거리가 있다. 그리고 바로 앞이 제주 민속 자연사 박물관(↗). 그래! 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국수를 한 그릇 먹고 박물관을 구경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차를 몰고 나섰다.
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어라? 뒷바퀴 하나가 심하게 주저앉았다. 수상한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푹! 주저앉았다. 펑크가 난 걸까? 타이어가 찢어진 걸까? 걱정하면서 보험사에 전화를 걸었다. 10분? 15분? 만에 서비스 기사님이 출동하셨다. 척 보시더니 타이어에 구멍이 난 것 같다고 하시고는 공기압을 체크하신다. 그러고 나서 구멍난 부위를 찾아서 지렁이(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는데 다들 이렇게 부르더라)를 쑥~ 꼽아서 구멍을 막으시고는 다시 바람을 넣어주셨다. 시골길을 많이 달렸다고 말씀드렸더니 뭔가 뾰족한 게 박혔던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더라.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고 금방 끝나는 수리(?)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근데 말이죠... 이쪽 앞 바퀴도 좀 수상합니다." 하시더니 앞쪽 타이어의 공기압을 재보신다.
"이 타이어도 분명히 구멍이 났습니다."
"어! 그럼 이것도 고쳐주시죠?"
"제가 여기서 이거까지 수리를 해버리면 긴급출동 서비스를 2회 사용하신 걸로 체크가 됩니다. 방금 보셨다시피 별로 큰일이 아니니까 가까운 타이어 가게에 가셔서 수리하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아, 그런 것이었구나. 긴급출동 서비스는 1년에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으니까 말 그대로 '긴급'할 때만 써야 되는 것. 게다가 내 차도 내 보험도 아니니까 막 쓸 순 없지. 이번 여행 중에 벌써 두 번이나 불렀으니...
서비스 기사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나서 근처에 타이어 수리할만한 곳이 있는지 폭풍 검색. 그랬더니 겨우 500 미터 거리에 타이어 대리점이 하나 있다는 걸 찾아냈다.
차를 몰고 들어갔더니 기사님들이 다들 식사 중이셨다. 그중 한 분이 나오셨고, 증상을 설명드렸더니 타이어를 후다닥 살펴 보시고는 마찬가지로 지렁이(?)를 박아 주셨다.
"비용은 어떻게 될까요?"
"네? 아니,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냥 가세요."
"예?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비용을 받으셔야죠."
"에이, 아니에요. 신경 쓰이시면 나중에 타이어 교체할 때 여기 와서 하세요~"
"네? 아저씨, 이거 서울 차예요. 다음 주면 다시 올라가요-0-"
"그럼 됐어요~ 안전운전하세요~"
그렇게 무료로 서비스를 받았다. 아, 고마워라 제주의 인심! 나중에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보통 만원 정도 받는 서비스라고 하던데...
자, 모든 수리를 마쳤으니 다시 제주자연사박물관(↗)으로. 차를 세워두고 길 건너의 국수거리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경비 아저씨가 나를 불러 세운다.
"어이, 아저씨.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박물관 오신거 맞아요?"
뜨끔했다. 박물관에 온 게 맞긴 맞는데, 지금 당장은 길을 건너서 국수집을 찾아 가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당황해선 안되는 타이밍이었다.
"박물관 온 거 맞습니다. 헌데 저쪽 길 건너가 국수거리 맞죠?"
"네, 그쪽으로 길 건너가면 국숫집들이 많습니다."
"박물관 구경하고 나와서 국수를 먹을까 싶어서 한번 슬쩍 살펴봤습니다. 혹시 어디가 맛있나요?"
"거기 국숫집들 다 똑같지 뭐. 어딜 가나 다 비슷해요."
"아, 그렇군요. 그럼 그냥 큰 집가서 먹으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당황하지 않고 말을 잘 둘러댔다. 그리고 마지막을 질문으로 끝내면서 경비 아저씨의 주의를 돌렸다. 휴... 하지만... 배가 고픈데 곧바로 국수를 먹으러 가지 못하고 천상 박물관을 먼저 구경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ㅠㅜ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제주의 지형과 생태 환경 등등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단순히 '자연사 박물관'이 아니라 '민속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주의 특색있는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전시장이 꽤 어두웠고 멋진 사진을 얻을만한 포인트는 없었기에 사진은 찍지 않았다.
생각보다 전시실이 많아서 관람하던 중간에 카페테리아에서 휴식. 물을 한 잔 사서 마시려고 하는데 조릿대로 만든 차가 있다. 조릿대? 조릿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만화 미스터 초밥왕 내용 중에 토호쿠의 전설의 요리사와 외딴 섬에서 산, 강, 바다의 진미를 겨루는 내용이 있다. 대결 전날 밤 다이넨지 사부로타가 쇼타에게 피로를 풀기에 좋은 차라면서 '얼룩조릿대'로 끓인 차를 주는 장면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오호! 이름은 좀 다르지만 비슷한 맛이겠지? 싶어서 마셔보는데...
어! 맛있다! 이거 꽤 마음에 들어서 다시 보면 또 마시고 싶었는데, 편의점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서 잠깐 고민이 있었다. 차를 그대로 주차장에 두고 국수 거리를 걸어갈까? 아까 경비 아저씨가 뭐라고 했었는데, 굳이 차를 세워두고 가야하나? 그냥 차를 가지고 갈까? 말 그대로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차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아, 소심하여라...
유명하지 않은, 작은 가게를 가보고 싶었지만 차를 가지고 움직이려다보니 주차장이 있는 국숫집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방문한 곳이 삼대 국수회관 본점(↗). 결론부터 말하자면 뭐 그냥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고기국수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꽤나 깔끔한 고기국수를 먹었었기(↗) 때문에 이번엔 비빔국수로. 딱 생각했던 그 맛. 대단히 맛있지도 않고, 그냥 딱 그런 맛.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사이드로 나오는 국물이었다. 어차피(?) 고기국수용 육수가 있을텐데 굳이 밍밍한 육수를...
식사를 마치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를 꺼내 나오는데,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지하주차장이 그리 크지 않았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램프 쪽의 경사가 꽤나 급한 곳이었다. 당연히 속도는 많이 낼 수 없었고 거의 기어가다시피하면서 램프에 진입했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서 그랬는지 탄력을 받지 못해서 못 올라가는 거다. 그래서 버릇처럼 오르막에서 힘을 주기 위해 기어를 2단으로 내렸는데, 갑자기 시동이 꺼지는 거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엄청나게 당황했다.
시동이 꺼진 차는 느린 속도이긴 했지만 뒤로 밀리고 있었다. 다행히 뒤에 따라나오는 차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뒤에 차가 따라 나오고 있었다면 더욱 크게 당황할 뻔 했다. 꺼진 시동을 다시 걸기 위해서 열쇠를 아무리 돌려도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당연했다. 기어가 D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일단 뒤로 밀리는 차를 세우기 위해서 기어를 P에 넣으려했지만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차의 기어는 P로 들어가지 않았다. 당황하면서 일단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차가 자꾸 뒤로 밀리면 안 되니까.
그런 다음 시동을 걸기위해 노력을 하는데, 어떻게 해도 시동이 걸리지 않는 거다. 그랬다. 초보 운전자는 몰랐던 것이다. N에서도 시동이 걸린다는 걸. 시동을 걸려고 아무리 기어를 P에 놓으려해도 기어는 들어가지 않고, D에서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아! 씨! 이거 뭐야! 하면서 1단 2단 3단 막 넣어보다가 우연히 기어가 N에 들어갔고, 시동이 걸렸다. 그제서야 기어를 다시 D로 돌리고 사이드를 풀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글은 길게 썼지만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당황과 긴장은 말로 다 할 수 없을만큼이었다... 휴... 그래, 정말 그랬다. 초보 운전자가 겪어야 하는 일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겪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것은 잠시. 새로운 지식을 얻었으니 됐다! 다음엔 당황하지 않겠군. 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누군가가 페이스북을 통해 추천해준 곳을 찾아가기 위해 멀리 청수리까지 이동. 아파트먼트 커피(↗)를 찾았다.
이런 곳에 카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외진 곳. 꺾어 들어가야 하는 길을 지나쳐서 U턴을 한 번 해야 했다.
한적한 곳에 있다보니 창 밖으로 보이는 경치도 한적한 그것.
이곳의 커피는 일단 에스프레소가 아니라 핸드드립이라서 마시기도 전부터 일단 마음에 들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와 무화과 파이. 드립 스타일은 매우 연한 편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 역시 커피는 핸드드립이지!
그동안 밀린 여행 메모를 정리하다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커피도 부족해서 한 잔 더. 이번엔 인도네시아 만델링. 한적한 곳에서 혼자, 마음에 쏙 드는 커피를 마시면서 간단한 작업을 마치고 나니 기분이 편안해졌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제주의 지인과 연락이 닿았다. 같이 저녁을 먹자길래 오랜만에 돼지갈비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추천해준 집. 마침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여서 차를 두고 걸어갔는데... 생각보단 멀었다 ㅠㅜ
제주의 지인 말에 따르면 오겹살집은 많지만 의외로 돼지갈비를 잘하는 집이 별로 없다고. 그나마 여기가 괜찮은 집이라는데, 실제로 먹어보니 꽤나 괜찮은 돼지갈비였다. 아, 물론 오랜만에 먹었다는 것이 큰 이유로 작동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잘 기억이 안 나는 김치찌개. 비쥬얼을 보니 맛있어 보이는데... 왜 맛이 기억이 안 날까?
2차로 찾은 곳은 지인이 궁금하다며 같이 가보자고 한 곳. 메종글래드 제주 2층(맞나?)에 위치한 Mark.T(↗). 최근 제주에는 제대로 된 바들이 생기고 있는 중인데, 이곳도 그중의 하나라고 한다. 더부즈(↗)는 여러 번 가봤을테니 오늘은 이곳으로 가보자고.
마크티의 메뉴판? 아니면 메뉴북? 바의 이름인 Mark.T는 허클베리 핀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오늘의 시작은 오랜만에 자카파 23. 달달한 맛이 땡길 때 그리고 좀더 저렴하게 '오래된' 맛을 느끼고 싶을 때 선택하는 술이다. 개인적으로 20년 이상된 술들은 어느 정도 공통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스키는 그 정도 오래된 것을 마시려면 너무 비싼데 비해서 자카파는 꽤나 퀄리티가 좋은데도 불구하고 럼이라서 가격이 저렴한 편.
내가 이런 술을 마셨던가? Signatory에서 병입한 라프로익 1998? 한정 보틀인데... 분명히 이날 별로 취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런 술을 마셨다면 기억이 나야 하는데...
그래, 아마 바텐더가 자랑하려고 보여준 병일 수도 있다. 내가 마신 것은 뒤쪽에 있는 오반 14 정도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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