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서둘러서 출발하지 않은 데다가, 중간에 지진으로 끊어진 길로 들어서서 30분 이상의 시간을 돌았고, 아소산에 들러 드라이브도 하고, 우연하게 찾은 터널 양조장을 구경하고 드디어 타카치호 협곡(高千穂峡)에 도착했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가 타카치호 근처에 다다르니 역시 유명 관광지답게 번화해진다. 건물의 밀도가 훨씬 높아지고, 차량 통행량도 많아졌다. 일단은 차를 세워야 했다. 두리번거리며 표지판을 보고 주차장을 찾으려 했지만 그랬다가 너무 먼 곳에 차를 세우고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르는 일. 잠깐 차를 세우고, 익숙하지 않은 네비게이션은 꺼버렸다. 그리고 다시 구글맵을 열어 산책로에 가까운 주차장을 찾았다. 반대편에도 주차장이 있었지만 일단 제1 주차장(第一御塩井停車場)으로 향했다.
주차장은 거의 만차였다. 약 90% 정도가 채워진 상태로 계속 차가 들고 나는 상황. 평일인데도 이 정도라니, 역시 유명 관광지!
차를 세운 다음 가장 급한 것은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벌써 오후 3시가 넘은 시각. 아침을 든든하게 먹지 않았다면 지쳐 쓰러졌을지도 모르는 시간이다. 너무너무 배가 고팠다. 주차장 바로 앞에 치호노이에(千穂の家)라는 식당이 보였다. 가게 밖에 사진이 있는 메뉴가 보였고, 한글로 된 메뉴판도 있는 곳.
타카치호는 미야자키현(宮崎県)이니까 미야자키의 특산물인 토종닭고기를 먹고 싶었는데, 마침 치킨남방이 메뉴에 보이길래 바로 주문. 토종닭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말 맛있는 닭이었다. 그 쫄깃한 육질로 미루어 봤을 때 아마도 토종닭이 아니었을까?
타카치호 협곡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미스터 초밥왕]이라는 만화 때문이었다. 어린 초밥 요리사가 초밥 대회에 출전해 겪는 다양한 일을 그린 만화인데, 전국대회 편에서는 큐슈 전역의 유명 관광지를 일주하듯 돌아다니며 대회를 펼치게 된다. 거의 외우다시피 여러 번 읽은 만화이다 보니 결국 '큐슈 전역의 유명 관광지'도 다양하게 알게 됐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타카치호 협곡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른 장소보다 그곳이 땡겼다. 언젠가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막연하게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곳이었는데, '일본에서 렌터카를 빌려 돌아다녀볼까?' 하는 생각을 점점 구체화하다 보니 큐슈와 시코쿠가 후보지로 올랐고, 그렇다면 꼭 가봐야 하는 1순위는 당연하게도 타카치호 협곡이 되었다. 어찌 보면 이번 여행이 시작된 이유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거다.
그렇게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멀리서부터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거리는, 커다란 기대를 가진 가슴을 좀 진정시키고 드디어 만난 타카치호 협곡!
어라? 내가 알고 있던, 사진으로 많이 본 그 지형이 맞기는 한데... 물 색깔이 왜 이렇지?
이런 색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날이 추워져서 보트를 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달랐다. 물 색깔이 달랐다!!
아, 그러고 보니 바로 엊그제 태풍이 지나갔구나. 그래서 석회질 가득한 계곡 물이 바닥부터 뒤집어져서 혼통 뿌연 시멘트 색깔로 변했구나. 며칠이 지나서 석회질이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으면 다시 오묘한 빛깔의 물 색깔이 돌아오겠구나... 결국 태풍은 나의 여행에 호재가 아니아 악재였구나 ㅠㅜ
태풍이 이번 여행에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하며 산책로를 걷다 보니 비록 물 색깔은 상상과 달랐지만 이곳의 지형은 아주 독특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는 다시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여행 내내 '사람'을 별로 만나지 못하다가 유명한 곳에 오니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것도 기분이 좋아진 이유 중의 하나였을 수도 있겠다. 산책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인사하며 부딪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타카치호 협곡은 일본의 건국 신화가 시작된 곳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화도의 마니산 같은 곳이라고 할까? 그러고 보면 미야자키의 미야자키 신궁(宮崎神宮)은 일본 초대 천황의 사당을 모시고 있는 곳이고, 미야자키의 플라네타리움에서 틀어줬던 영상도 일본의 신화에 대한 것이었던 것을 떠올려보니 미야자키(宮崎) 지역은 일본에서 '건국신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 지역인가 보다.
역시 신비로운 지형은 인간의 힘보다는 자연과 신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니까, 신비로운 지형들은 신화와 깊은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산책로를 따라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가 신바시 다리(神橋) 부근에서 돌아 내려왔다. 천천히 쉬면서, 사진 찍으면서, 영상 찍으면서 한 시간 정도가 걸린 거리니까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보고 싶은 타카치호의 풍경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코스였다. 내려올 때에는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을 찍으면서 내려왔다.
산책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어느덧 오후 다섯 시가 가까운 시간이다. 돌아가는 데 두 시간이 걸릴 테니 이제 슬슬 구마모토로 돌아가서 렌터카를 반납해야 할 시간이다. 해가 지고 나면 어두워질 것이라는, 당연한 일도 문제였다. 야간 운전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은 데다가 익숙하지 않은 해외에서의 운전이니까.
퇴근 시간과 겹쳐서인지 구마모토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교통 체증도 점점 심해졌다. 아슬아슬하게 렌터카를 반납하고 나니 이미 도시는 어두워져 있었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편의점에 들러 간단하게 샐러드를 사고 나서 '소츄를 한 잔 곁들일까?' 싶어 매장을 둘러보니, 엊그제 맛있게 마셨던 하쿠타케(白岳)가 보인다. 스트레이트로 마시면 독할 것 같아서 섞어서 마실 음료도 골랐다. 기본적인 하이볼처럼 섞기 위해 탄산수, 우롱하이를 만들기 위해 우롱차를 샀다. 혹시나 싶어 편의점 음료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세븐일레븐 쟈스민차도 하나 구입.
호텔로 돌아와 간단한 안주와 샐러드를 곁들여 하쿠타케를 마셨다. 쌀로 만든 소츄인데 역하지 않아서 마음에 드는 구마모토의 소츄. 우롱하이로 먹는 것은 역시 구수한 할아버지의 맛이 나고, 탄산수를 써서 하이볼로 만들면 깔끔한 맛이다. 쟈스민차는 술에 섞어 마시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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