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결국 늦은 시간에 번화가로 기어 나갔었다. 그리고 바 차밍의 마스터와 함께 새벽까지 힘차게 달렸다. 그간 겪어본 일본 사람들의 음주 습관은... 엄청 늦은 시간까지, 엄청 잘 마신다는 거다. 물론 내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자꾸 어울리게 되는 것이겠지만, '모두가' 술을 잘 못 마시거나 약한은 아니라는 얘기.
어쨌든 호텔의 창밖을 보니 구름이 많긴 하지만 맑은 하늘이었다. 솔직히 이 하늘을 자고 나서 본 것인지, 밤을 새우고 본 것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힘차게' 달렸다.
짐을 모두 챙겨 체크아웃을 하려는데, 주차장에 빼곡히 들어찬 차를 보게 됐다. 2층에 있는 홀에서 뭔가 행사가 있는 것 같았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한 사람들의 차량이었던 것 같은데, 주차한 모습이 마치 퍼즐을 맞추듯 잘 정렬된 게 신기한 풍경이라서 한 컷.
기차를 타기 위해 구마모토 역(熊本駅)으로 가보니 1층에 거대 쿠마몬이 보인다. 구마모토의 앞글자인 쿠마(熊)가 곰이라는 뜻이라는 것에서 착안해 만든 구마모토 현의 캐릭터. 한때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 중의 하나였고, 지금도 유명한 캐릭터다.
그저께, 일정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야쿠시마(屋久島)에 가고 싶어 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숲의 실제 배경이라는 이끼의 숲(苔むす森)이 있는 섬. 온다 리쿠의 소설 [흑과 다의 환상]에서 친구들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섬. 수 천년이 넘은 삼나무 - 정확한 수령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일본의 주장은 7천 년 이상이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약 1800년 정도다 - 가 살고 있는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된 섬.
언젠가 가보고 싶었지만 등산 내지는 적어도 트래킹 정도는 해야 하는 코스인 데다가, 비행기 - 열차 - 배로 이어지는 불편한 교통 때문에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큐슈 일주니까 당연히 가고시마(鹿児島)에 들를 것이고 그렇다면 배만 타고 들어갔다 나오면 되는 거다. 그래서 급하게 결심했다. 이번엔 야쿠시마에 꼭 가보겠다고.
구마모토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약 한 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가고시마추오 역(鹿児島中央駅)에 내릴 수 있다. 가고시마에는 가고시마 역(鹿児島駅)도 있지만 신칸센을 타고 내릴 수 있는 역은 가고시마추오 역이다. 경주에도 경주 역이 있지만 KTX가 다니는 역은 신경주역인 것과 비슷한 상황.
아침에 잠깐 파란 하늘을 보여주던 하늘은 가고시마에 도착하니 잔뜩 흐려있고 드디어 비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너무 힘차게 달린 여파로 몸이 말이 아니었기도 해서 택시를 타고 가고시마 항으로 가달라고 했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어보시길래 야쿠시마로 들어가는 배를 타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토피&로켓 승강장(トッピー&ロケット乗り場 )에 내려주셨다.
나중에 지도를 뒤져보니 '가고시마 항'이라는 이름으로는 제대로 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서로 다른 회사에서 자신들이 운항하는 배의 승강장을 모두 별도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는 '여객터미널'이 없는 거다. 대충 지도에서 보면 혼코신마치(本港新町) 지역이 가고시마의 항구 지역이다.
평일인 데다가 성수기도 아니라서 딱히 배편을 예약하지는 않았다. 숙소와 렌터카는 혹시 몰라 이미 예약해둔 상태. 예상대로 배편은 매우 여유로웠다. 다네가시마(種子島)를 거쳐가는 것이 아니라 야쿠시마 직행인 토피의 승선권을 바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배를 타는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배를 타고 이렇게 장거리 이동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고시마 항구에서 야쿠시마의 미야노우라 항(宮之浦港)까지는 약 140Km. 두 시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하는 걸 생각해보면 배의 속도는 대략 시속 6~70km 정도 되나 보다.
140Km 면 완도 ~ 제주의 거리보다 살짝 먼 거리이고 목포 ~ 제주보다는 가까운 정도의 거리다. 막상 야쿠시마를 다녀올 때에는 얼마나 먼 곳인지 깨닫지 못했는데,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니 엄청 먼 곳을 다녀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전날의 피로를 풀어주는 두 시간의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드디어 야쿠시마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곳은 미야노우라 항(宮之浦港). 빈 속으로 배를 타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속이 굉장히 허한 느낌이었다. 전날의 음주로 지친 위를 풀어주어야 했다. 빗발이 흩날려 싸늘해진 날씨에 식어버린 몸을 데워줘야 했다.
렌터카를 찾고 숙소에 체크인하기 전에 일단 몸을 데우고 속을 풀어야 했다. 가방을 메고, 우산을 쓰고 항구 밖으로 나서다 보니 바로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카페 비슷한 것이 보인다. 일단 가까이 가서 메뉴판을 보니 식사가 가능한 곳이다. 더 생각할 것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우동을 한 그릇 주문했다.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해초가 들어가서 감칠맛이 풍부했고, 따뜻한 국물이 몸을 데워주고 속을 풀어주니,
이제 야쿠시마에 정말 도착했구나~! 하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후 비가 오는 곳을 돌아다니느라 사진을 찍을 정신이 없어 글만 잔뜩 나올 예정입니다. -0-)
우선은 렌터카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차를 찾은 다음엔 차를 가지고 숙소로 가면 되니까. 지도를 보니 걸어서 10분 정도. 전화를 해서 픽업을 부탁하는 것보다는 비가 그친 사이에 서둘러 걸어가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걸으면서 야쿠시마의 풍경을 먼저 눈에 넣고 싶기도 했다.
10분쯤 걸었을까? 지도 상에는 렌터카 회사 근처라고 나오는데, 눈을 들어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이름의 건물도, 회사도 없다. 렌터카 회사처럼 보이는 곳조차 없다. 두세 번 정도 근처를 왔다 갔다 배회하다가 결국 전화를 걸었다. 자세히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이었지만 (나의 일본어 실력은 매우 짧다 ㅠㅜ) 반복해서 듣다 보니 결국 렌터카 업체를 찾을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사진과는 다른 건물이었고, 주유소와 붙어 있는 곳이라 반납할 때 기름을 채우기는 쉬워 보였다.
렌트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어디서 왔느냐. 한국? 멀리서 왔네. 한국 사람들도 가끔 온다. 비가 와서 어떡하냐. 며칠 동안 빌린다고? 3일 동안 빌리면... 27일에 나가는 거네? 흠... 혹시 태풍 오는 거 알고 있냐? 27일이면 태풍 때문에 배가 안 뜰 수도 있다.
뭐라고? 태풍이 또 온다고??
그랬다. 2017년 22호 태풍 사올라. 21호 태풍 란이 소멸하자마자 바로 나타난 태풍. 미리 얘기하자면 이후의 여행은 이 녀석이 사라질 때까지 함께하게 된다.
어쨌든 혹시라도 태풍 때문에 배가 안 뜬다면 출도를 미루는 것이 아니라 당겨야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렌터카를 미리 반납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물어봤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고, 일본어 실력이 미천해서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결항이 결정된 이후에는 위약금 없이 일정을 변경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위약금을 내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너한테는 특별히 위약금을 받지 않을 테니 일정이 변경되면 미리 알려달라고 했다.
차를 빌리고 나서 숙소를 체크해보니 걸어서 3분 거리다. -0-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 어느덧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고, 숙소까지 아주 짧은 거리를 운전해서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의 이름은 수도마리 민슈쿠 후렌도(素泊民宿 ふれんど). 수도마리(素泊)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숙소라는 뜻이다. 민숙(民宿)은 우리나라의 민박과 비슷한 단어인데, 사실 일본의 민숙은 우리의 민박과는 많이 다르다. 훨씬 깔끔하고 가격대도 비싸고 식사를 함께 제공하는 곳이 많기 때문인데, 이곳은 말 그대로 '게스트 하우스'였다.
숙소를 관리하는 분과 얘기해서 예약을 확인하고, 체크인하고, 숙소 곳곳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공용실을 예약하지 않고 독방을 예약했는데 화장실, 욕실, 주방 등은 공용이라서 함께 사용해야 하는 곳이었다. 방은 2인실이었지만 어차피 나는 혼자라서 충분히 넓었고, 바닥에 깔린 다다미와 나무로 만든 벽장은 많이 낡아서 특유의 세월을 느낄 수 있는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전날의 과음, 부족한 취침, 내리는 빗방울, 쌀쌀한 바람, 두 시간의 항해, 태풍이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건이었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체크인이 끝나고 짐을 풀었다. 이제 좀 누워서 쉬어야겠다... 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까 예약을 확인해주신 분이 방문을 두드린다.
사투리가 좀 섞인 일본어로 뭔가를 말씀하시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알아들은 말은 '예약이 잘못됐다'는 것뿐. 음? 뭐지? 예약이 뭐가 어떻게 잘못됐다는 거지? 나는 계속 핸드폰으로 나의 예약을 확인증 시켜 주었지만 손을 내저으며 그거 말고, 예약이 잘못됐다는 거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결국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나에게 바꿔준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여성분이었다. 민숙의 주인장이라고 소개하시고는 예약에 문제가 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나는 문제가 없다고 말을 하는데, 계속 핀트가 어긋난 대화를 주고받다가, 결국 몇 가지 단어를 더 알아 들었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내가 예약한 방은 2인실인데 혼자서 사용할 거니까 2인의 요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1인분만 내라는 거다. 그러니까 '너 지금 너무 비싸게 예약했어. 예약 취소하고 현장에서 더 싼 요금으로 결제하자'는 거였다. 피곤한데 쉬지 못하게 해서 짜증이 조금 나는 중이었는데,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는 그 인심에 감동했다.
결국 부킹닷컴을 통한 예약을 취소하고, 약 8천엔 정도 할인된 금액으로 현장에서 현금으로 결제했다.
숙소에 도착한 것이 세 시가 좀 넘는 시각이었으니까 두 시간쯤 누워 있었을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일어났다. 배를 타고, 차를 렌트하고, 숙소까지 오면서 꽤 많은 관광객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등산화와 폴을 비롯해 각종 등산 장비로 풀 세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이끼의 숲 정도는 보고 가고 싶은데, 저런 장비가 필요한 걸까? 있는 거라곤 트래킹 할 때 신으려고 새로 산 운동화뿐인데...
혼자 이리저리 검색을 해봐도 마땅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까 렌터카 업체 근처에 등산 장비 렌탈 샵을 하나 봐 둔 게 있었다. 그렇다면 야쿠시마에는 장비 렌탈 샵이 그곳 말고도 있을 터. 그래서 검색을 해보니 야쿠시마 비지터 센터(屋久島観光センター)라는 곳에서 각종 안내도 해주고, 장비도 렌탈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빗속을 뚫고 차를 가지고 나섰다.
센터 1층 안쪽에 장비를 렌탈 하는 곳이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땐 혼자 오신 것 같은 여성분이 각종 장비를 체크하며 대여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려고 근처에서 분위기를 좀 읽어보니, 오래 걸릴 것 같다. 그래서 일단 현지 상황을 잘 알 것 같은 사람을 찾아서 카운터 쪽으로 갔다. 그러고는 무작정 말을 걸었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요. 혹시 시라타니운스이쿄(白谷雲水峡) - 이끼의 숲이 있는 지역 - 에 가려면 특별한 장비가 필요한가요? 아뇨. 거기는 문제없어요. 청바지에 운동화로도 갈 수 있을까요? 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비옷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신발이 젖을지도 모르니 방수가 되는 신발이 좋을 것 같고요. 저쪽에 있는 사람들처럼 장비가 필요한 곳이 아니라는 거죠? 저 사람들은 조몬스기(縄文杉)에 가려는 사람들이에요. 조몬스기는 왕복 여덟 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라 가이드도 필요하고, 도시락도 준비해야 하고, 제대로 된 등산 장비가 필요해요. 시라타니운스이쿄나 야쿠스기 랜드(ヤクスギランド) 같은 곳은 가벼운 옷차림으로도 충분해요. (나의 옷차림을 보여주며) 이런 옷차림으로도 된다는 거죠? 네네, 문제없어요.
아, 이 말이 듣고 싶었다. 이곳에서 살고 있고, 비지터 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이런 옷차림으로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완전 편해졌다. 엄청난 장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전부 조몬스기에 가려는 사람들이구나. 어차피 나는 평생(?) 조몬스기에 가고 싶어 지지는 않을 테니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겠네. 혹시 내일 비가 오면 다시 이곳에 들러서 비옷만 하나 사면 될 일이었다.
숙소로 다시 돌아와서 한 시간 정도 꿀잠을 잤다. 마음이 편해지니 잠깐 바닥에 머리를 댔더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숙소 관리 아저씨에게 추천받은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들렀다.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식당이었고 이름은 시오사이(潮騒). 타베로그를 살펴보니 평점이 3.5가 넘는다. 성수기에는 예약이 힘들 수도 있는 가게라는 얘기다.
메뉴를 찬찬히 살펴봤다. 다행히 아예 알아볼 수 없는 글자는 아니라서 천천히 번역해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쿠비오레사바(首折れサバ) 정식을 발견했다. 우리말로 하면 '목 꺾은 고등어' 정도가 되는데, 미스터 초밥왕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배에서 고등어를 잡자마자 목을 꺾은 채 바닷물에 담가 끌고 나니며 피를 빼는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 처리한 고등어의 육질이 훨씬 뛰어나다는 얘기였다. 그게 가고시마의 특산이었구나. 특히 야쿠시마 지역에서 고등어를 그렇게 잡는다고 한다.
쿠비오레사바 정식을 주문했는데, 오늘은 안 된단다. ㅠ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야쿠시마의 두 번째 명물인 날치 튀김 정식을 주문했다. 사세보에서 이미 날치 라멘을 먹어본 터라서 날치라는 생선을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날치 자체는 특별한 느낌이 없었다. 약간은 퍽퍽한 느낌의 비린내 없는 살이랄까. 튀김의 퀄리티는 좋은 편이었고 자왕무시가 맛있었고 미소시루도 좋았다. 그리고 언제나 마음에 뜨는 것은 짠지들.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는 내일을 위해 숙소에서 일찍 쉬기로 했다. 내일은 체력적으로 힘든 하루가 될 확률이 높았다. 간편한 옷차림으로도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왕복 세 시간 정도의 산길을 걸어야 하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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