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푹 쉬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너무나 가보고 싶던 곳을 갈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이기도 했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트래킹 준비를 했다.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편한 옷을 입고, 신발 끈을 꽉 조였다. 체온을 잃지 않기 위해 위에 걸칠 옷도 하나 더 준비하고, 혹시나 중간에 당이 떨어질까 봐 초코바를 두 개 정도 가방에 넣었다. 어차피 주차장까지는 차를 가지고 갈 거라서 차에는 여벌의 옷도 챙겨두었다.
민숙 후렌도에서 출발해 시라타니운스이쿄의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꽤나 험난했다. 좁은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가야 하는 난코스. 구글맵으로 검색해보면 20분 정도가 걸릴다고 나오지만 초보운전자에겐 두 배가 훨씬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왕복 1차로인 구간이 많은 데다가 차선도 굉장히 좁은 길이라서 반대 방향에 차가 나타나면 서로 눈치를 보며 피할 자리를 만들어 줘야 했다. 관광버스라도 만나면 긴장감은 몇 배가 된다. 그래도 버스 기사님들은 운전에 베테랑인 경우가 많아서 눈치를 잘 보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불가능할 것처럼 좁은 길도 같이 지나갈 수 있었다.
미리 스포를 하자면, 내일은 이것보다 훨~~~씬 어려운 운전을 하게 되는데... 이건 해당 포스팅에서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어쨌든 산길 운전이 그리 쉽지 않았다는 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려다본 하늘은 파랗게 맑았다. 저 멀리 남쪽 바다에 태풍이 발생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날씨였다. 야쿠시마는 어차피 맑은 날이 별로 없으니 별 기대하지 말고 가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 날씨는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나 파란 하늘이라니.
1인당 500엔의 입장료를 내면 안내 팸플릿을 나눠주는데, 위의 이미지는 일본어지만 실물 팸플릿은 영어나 한국어 버전도 있다.
본격적인 트래킹을 시작하기 전에 코스를 미리 정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목적지는 이끼의 숲(苔むす森, 코케무스모리)이니까 왕복 4시간이 걸리는 녹색 코스를 선택해야 했다. 일단 이끼의 숲까지 가본 다음 힘이 들면 이후 타이코이와(太鼓岩)까지 가는 코스는 생략하고 돌아오겠다는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최종 코스를 먼저 얘기하자면, 이끼의 숲 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걸려 도착했다. 길도 평탄해서 큰 어려움이 없는 코스였다. 이후 타이코이와까지 가는 코스는 꽤 어려운 코스라고 해서 뒤로 돌아 다시 내려왔는데, 왔던 길로 내려가는 건 재미없을 것 같아서 노란색 코스로 돌아 내려왔다. 이쪽 코스는 좀 험한 길을 걸어야 하는 코스라서 쉽지는 않았고, 약 두 시간 만에 다시 입구까지 나올 수 있었다.
아마 쉬운 길로 이끼의 숲만 보고 나온다면 빠른 걸음으로 두 시간이면 가능할 것도 같지만, 다시 한번 방문한다면 타이코이와를 포함해 약 다섯 시간의 코스를 짜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아마 [입구 → 녹색 코스 따라 이끼의 숲(1시간) → 타이코이와(2시간) → 이끼의 숲(3시간) → 11번에서 노란색 코스로 → 입구(5시간)] 이런 코스가 될 것 같은데, 아마 다시 방문할 기회는 없겠지...
※ 이후 글의 양은 매우 적고 사진의 양이 매우 많습니다.
트래킹 코스는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손질되어 있었다. 너무 과하게 정비해서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이 아니고 위험하지 않고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손길만 닿았다고 할까. 그리고 대부분 목재를 재료로 이용해 정리했기 때문에 이질감이 없다는 것도 좋았다.
시라타니운스이쿄(白谷雲水峡)의 한자를 잘 생각해보면 하얀(白) 골짜기(谷), 구름(雲)과 물(水) 그리고 또 골짜기(峡. 한국식 한자로는 峽). 뭔가 첩첩산중 험난한 골짜기에 구름과 물이 많아서 하얗게 흐려진 장면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계곡 구역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드니 이끼에 손대지 말라는 안내문과 함께 본격적으로 이끼 낀 풍경이 나타난다. 하늘이 그렇게나 맑고 파랬는데,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 등산로에는 그늘이 드리워져있고 심지어 서늘할 정도였다.
그리고 슬슬 삼나무들, 야쿠시마에서만 산다고 해서 야쿠스기(屋久杉)라고 불리는 녀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던 나에게 계속해서 기대 이상의 풍경들이 나타났다.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사진을 찍었다. 이 포스팅을 위해 사진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었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산장(白谷山荘)이 하나 나타났다. 매점 같은 게 있는 곳은 아니고 화장실이 있고, 간단하게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테이블 같은 게 있는 곳이다. 그리고 실내에서는 숙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요금을 받고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서 특별한 도구나 장비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아마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하루 묵고, 다음 날 새벽에 타이코이와(太鼓岩)에 올라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이 이용할 것 같은 곳.
무인 산장을 지나니 풍경이 슬슬 바뀌기 시작한다. 이제 이끼의 숲, 코케무스모리가 등장하는 건가?
그리고 몇 무리의 사람들이 멈춰 서서 계속 사진을 찍는 곳이 나타났다. 누가 봐도 이곳이었다. 바로 이끼의 숲(苔むす森 ).
아마 굉장히 좁은 하나의 포인트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 근처 구역에서는 이렇게 이끼가 낀 바위들과 어우러진 풍경을 볼 수 있었으니,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구역을 가리키는 이름이겠지.
어딘가에서 원령공주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는 상투적은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분명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하야오가 이곳을 원령공주의 배경으로 사용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소설이나 영화에서 일상을 벗어나 머리를 비우고 싶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는 설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끼의 숲을 보고 나니 오늘의 목적을 모두 이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굳이 타이코이와(太鼓岩)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리를 해서라도 다녀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날의 기분은 이미 충분하고 넘쳤다.
다시 무인 산장을 지나 시라타니운스이쿄 트래킹 코스 안내문의 11번 포인트에서 노란색 코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끼의 숲까지 한 시간이 걸렸으니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내려가면 같은 시간이 더 걸릴 테고 왕복 두 시간 코스가 됐을 텐데, 같은 풍경을 보면서 내려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살짝 고민하다가 노란색 코스 쪽으로 돌아서 내려가는 것을 선택했다.
노란색의 코스로 접어드니 길이 좀 험해졌다. 경사가 심한 곳들을 오르거나 내려가야 하는 경우도 많고, 길도 험해서 발목도 조심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더 특별한 풍경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비슷한 분위기의 풍경이 계속되는 코스라 굳이 이쪽을 선택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코스가 시작됐던, 계곡물소리가 들리는 구역에 도착했다. 드디어 숲을 벗어나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숲 속의 습기를 말려주는 햇볕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시간 이상 빛이 제대로 들지 않을 정도의 숲 그늘 아래에서 습기 가득 먹은 이끼를 구경하고 나왔더니 출발할 때의 날씨도 이렇게 쾌청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전 9:30 정도에 출발해서 모든 코스가 끝난 시각이 12:30. 정확하게 세 시간짜리 코스였다. 그리고 딱 좋은 점심시간. 평소 운동을 별로 하지 않았던 근육들이 오랜만에 무리했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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