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편의 공원에 올라 사쿠라지마를 구경하고, 시립 미술관에 들러 엄청난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슬슬 배가 고파오고 있었기 때문에 샤워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고시마는 말 그대로 '소츄의 도시'다. 현대 일본에서 소츄의 인기는 가고시마의 이모소츄(고구마류를 원재료로 한 증류주) 덕분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좋은 쌀이 잘 자라는 동네에서는 니혼슈(쌀을 원재료로 한 발효주. 우리가 흔히 사케라고 부르는 그것)를 주로 만들었다면, 고구마가 잘 자라는 남쪽에서는 이모소츄를 만드는 곳이 많았던 거다.
샤워를 하고 소츄바를 탐방할 기대에 부풀어 호텔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호텔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어라? 8층에 온천탕이 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게다가 투숙객은 무료라고? 어? 온천? 태풍 때문에 이부스키에서의 모래찜질을 포기하고 가고시마로 바로 돌아왔는데, 이것은 우연인가 운명인가! 방에 돌아가서 목욕 채비를 한 다음 8층으로 올라갔다.
일본의 '온천'이라고 하면 다들 전통 일본식 건물을 떠올리고, 야외의 멋진 풍경과 함께하는 노천탕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우리의 대중탕과 비슷한 온천이 더 많다. 그냥 일반 대중탕과 온천의 차이는 '자연적으로' 물이 뜨거워진 것인지 인공적으로 물을 뜨겁게 만든 것인지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물론 디테일하게 살펴보면 온천수의 기준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있겠지만.
어쨌든 호텔 후리아게소(ホテル吹上荘)의 온천탕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투숙객에게 무료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괜찮은 곳이었다.
산책 중에 잠깐 쉬려고 앉은 벤치에서 지폐를 하나 주운 것 같이 반가운 온천욕을 마치고 드디어 가고시마의 밤거리로 나왔다. 일단은 저녁을 먹어야겠지. 타베로그와 구글맵으로 열심히 검색한 결과 1순위로 가보고 싶은 집은 분케무자키(分家無邪気)라는 이자카야. 쿠로미소(黒味噌, 흑된장) 오뎅이 맛있다는 평이 많은 곳이었다. 6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는데 가게는 이미 만석이었다. 일행은 없고 한 명이라고 말했더니 바 쪽 자리가 하나 남았다고 안내를 해준다. 앗싸! 럭키!
메뉴판을 받고서 가게 내부를 둘러봤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는 정겨운 가게였다. 그 안에 꽉 들어찬 사람들은 관광객이라기보다는 퇴근하고 한잔하러 들른 동네 사람들의 분위기를 풍긴다. 소츄를 전문으로 취급한다는 문구가 있는 집이 아니라 일반 이자카야(?)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양의 소츄병이 곳곳에 쌓여있다.
소츄를 한 잔 주문하려고 주류 메뉴를 보는데, 소츄만을 모아둔 메뉴판이 따로 있다. 응? 잔으로 마실 수 있는 소츄가 스무 종이 넘는다. 소츄 전문 바가 아니라 그냥 이자카야에서 이 정도의 메뉴라고? 역시 가고시마구나! -0-
일단 쿠로미소오뎅이 유명하다고 하니 오뎅을 주문했다. 아츠아게(厚揚げ, 튀긴두부), 다이콘(大根, 무), 쿠로부타로스(黒豚ロース, 흑돼지 로스) 간단하게 세 가지를 먼저 먹어봤다. 일본에서 '오뎅'이라고 하면 육수에 재료를 넣어서 장시간 끓여 먹는 음식을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오뎅이 주로 어묵만을 말하는 것과 다르다. 실제로 가게에 가보면 오뎅 그릇 안에 굉장히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 있고, 그 전체를 통틀어 오뎅이라고 말한다. 이 가게에서 쿠로미소오뎅이 유명하다고 했으니 아마도 이 가게에서 만드는 오뎅의 육수에는 쿠로미소를 사용했나보다. 그래서 그런지 육수가 진한 갈색빛을 띤다.
어디에서든 오뎅을 먹을 때 다이콘 그러니까 무를 꼭 주문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무는 오뎅 집에서 인기 메뉴 중 하나라서 편의점 오뎅 중에서는 가장 먼저 품절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곳은 가고시마라서 그런지 쿠로부타로스 그러니까 흑돼지 로스도 오뎅 메뉴에 들어 있는 게 신기했다. 어제 야쿠시마의 숙소에서 먹었던 가고시마 흑돼지가 생각나서 주문했는데, 글쎄... 아, 너무 맛있어서 글을 쓰는 지금도 침이 넘어갈 정도다.
메뉴판에 가득한 소츄를 하나씩 주문하면서 먹다 보니 안주가 더 필요해서 오크라(オクラ), 키비나고(キビナゴ, 샛줄멸), 네기(ネギ, 파), 쯔쿠네(つくね) 꼬치를 주문했다. 이곳은 안주가 저렴해서 더 매력이 있는 곳이었는데, (2017년 당시) 가장 싼 메뉴인 네기가 80엔이었고, 대부분의 오뎅이나 꼬치가 100엔에서 150엔 사이의 가격이었다.
몇 잔이나 마셨을까? 슬슬 허기를 피하고 나니 본격적인 소츄바에서 특별한 소츄들을 마셔보고 싶어졌다. 구글 검색으로 찾아본 바의 오픈 시간은 8시. 아직 오픈하기 전이니 어두워진 가고시마의 번화가를 좀 걸어 다니다가 찾아둔 가게로 가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1차를 마치고 나섰다.
어라? 밖으로 나와보니 비가 내린다. 역시 태풍이 오고 있나 보다. 그래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포기하고 일단 검색해둔 바가 있는 건물로 가봤다. 역시 아직은 가게 오픈 전이다.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를 한 잔 마시면서 가게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가게 문을 열었다. 열심히 검색한 이곳의 이름은 소츄바 이시즈에(本格 焼酎 バー 礎). 당연히 첫 손님이었다. 가게에 입장하는 순간 엄청난 양의 소츄병에 압도당했다. 나중에 마스터랑 얘기하면서 물어보니 1,500여 종의 소츄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와 일본에는 소츄의 종류가 정말 많군요?'라고 했더니 '네? 가고시마 것만 1,500여 종인데요?'라고 돌아오는 대답. 역시 가고시마는 소츄의 동네구나!
어떤 소츄를 좋아하냐고 묻길래 므기소츄(보리소주)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면서, 첫 잔으로 하나 추천해달라고 했다. 테이블 세팅비가 있는 정통 바이다 보니 기본 세팅도 정갈하게 나온다. 역시 위스키를 주력으로 판매하는 곳과는 음식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도 재밌었다.
첫 잔으로 추천받은 소츄는 므기홋카(麦ほっか)라는 보리소주. 보리의 구수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매력적인 소츄였다. 보리소주는 아무래도 그 '구수한' 향 때문에 현대적인 느낌보다는 정통의 맛에 가까운 편이다. 그리고 최근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보리소주 메이커들은 구수한 향을 포기하면서까지 깔끔하고 경쾌한 현대식의 증류주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 소츄는 구수한 향을 풍기면서도 깔끔한 느낌을 주는 멋진 소츄였다.
멋진 첫 잔을 마시고 나니 두 번 째 잔이 벌써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스터에게 가고시마라면 역시 이모소츄(고구마소주)겠죠? 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추천을 부탁드렸더니 나온 것이 히토리구라(一人蔵). 내가 보리소주를 좋아한다고 말한 다음이라서 그런 것인지, 보리소주에서 고구마소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고구마를 주재료로 쓰고 보리도 살짝 섞은 소주를 추천해주셨다.
계속해서 추천을 부탁드렸다. 세 번 째 잔은 사쿠라몬(桜門). 본격적인 이모소츄. 이름처럼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고 하면 과장이려나. 사실 그동안 이모소츄는 특별한 향이 느껴지지 않고 깔끔한 알콜만이 느껴져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구수한 향이 나는 므기소츄를 좋아했던 것도 이모소츄에서는 별다른 향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여기서 마시는 므기소츄들은 하나같이 밸런스가 좋으면서도 상쾌하고 향긋한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마스터가 재미난 소츄가 있다면서 두 병을 꺼내오셨다. 코지카(小鹿)라는 이모소츄였는데, 왼쪽의 검은 병은 카메(甕)라는 글자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검색해도 이 술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어서 그냥 한자를 사전에서 검색해봤더니 카메(かめ)라고 읽는 것 같고 뜻은 옹기, 항아리라는 뜻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왼쪽의 검은 병은 한정판이었고, 오른쪽의 하얀 병은 오피셜 보틀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술의 특별 한정판과 일반판을 비교해서 마셔보라는 추천이었던 거다. 솔직히 말해서 오른쪽의 일반판은 흔히 마실 수 있는 이모소츄였다. 그래서 별 감흥이 없었는데 왼쪽의 검은 병은, 뭐랄까 밸런스도 좋았지만, 숙성의 힘 같은 것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같은 이름의 술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 그리고 가고시마의 이모소츄,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츠마소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사츠마소츄(薩摩焼酎)는 가고시마현에서 나는 고구마와 물을 원료를 가지고 가고시마현에서 주조하여 단식증류기로 증류한 후, 병에 담은 본격 소주에만 붙일 수 있는 표기라고 한다. 사츠마는 가고시마의 옛 지명.
아무래도 도수가 높은 소츄를 몇 잔 마시고 나니 가벼운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상큼한 와인을 마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타베로그나 구글맵을 미리 검색하지 않았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비는 그쳤고, 거리는 전형적인 번화가의 그것이었다.
어떤 가게에서 어떤 술을 마시는 것이 좋을까? 비가 그친 밤거리를 걷다가 특이한 가게를 하나 발견했다. 이름은 RED & WHITE. 의자는 없고 테이블만 몇 개 있는 작은 바였다. 마스터 혼자서 대응하기 위해서인지 주문은 키오스크를 통해서 할 수 있다. 주로 라멘집에서 하던 것처럼 화면에서 메뉴를 고르고 돈을 넣고 티켓을 받은 다음 마스터에게 티켓을 주면 되는 시스템.
깔끔하게 입을 씻고 싶어서 화이트 와인을 글라스로 한 잔 마시고 나서 와인의 퀄리티가 궁금해서 레드 와인도 한 잔 마셨다. 500엔, 800엔, 1000엔, 1500엔짜리 글라스 와인이 있는 걸 보면 최소한 네 종류 이상의 보틀을 글라스 와인으로 판매하고 있다는 얘기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800엔이나 1000엔짜리 글라스 와인을 마셨을 것이고, 꽤 마시기 편한 와인들을 잘 골라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매일 자정 즈음이 되면 배가 고프다. 그래서 일본 여행 중에는 새벽에 라멘집에 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분명히 그럴 것 같아서 아까 소츄바 이시즈에의 마스터에게 라멘집을 물어봤었다. 그랬더니 라멘이 맛있는 집이 있고, 교자가 맛있는 집이 있는데 어디를 알려드릴까요? 라고 하길래 교자가 맛있는 집을 알려달라고 했다. 맛있는 라멘은 자주 먹어봤으니 교자가 맛있는 집은 얼마나 맛이 있으려나? 하는 궁금함 때문이었다.
그렇게 소개받은 집은 미토마 라멘(みとまラーメン). 구글맵을 찾아보니 지금은 폐업했다고 나온다. 어쨌든 마스터의 말 그대로 교자가 맛있는 집이었다. 라멘은... 사진으로 봐도 알 수 있듯이 평범했다. 아니, 솔직히 평범함보다 조금 더 아래의 맛이었다. 그에 비해서 교자는 꽤 퀄리티가 있었는데, 그래도 별로 추천하고 싶은 집은 아니었다.
역시, 라멘이 먹고 싶었으니까 라멘이 맛있는 집을 추천해달라고 했어야 했다. 이제 와서, 뒤늦은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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