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흐린 하늘이다. 뉴스를 보니 며칠 동안 속도가 느려졌던 22호 태풍 사올라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려 북상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은 태풍과 제대로 맞닥뜨리는 날이겠구나. 멀리 돌아다닐 생각하지 말고 호텔에서 푹 쉬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호텔 8층에 있는 온천탕에서 이른 아침 온천욕을 한 번 더 하고 거리로 나섰다. 가고시마 역(鹿児島駅)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 새벽에 내린 비 때문에 거리는 젖어있었고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지뢰처럼 걸음을 조심하게 만들었지만, 거리의 풍경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걸었다.
그래, 가고시마츄오역(鹿児島中央駅)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숙소에서 비슷한 시간을 걸어 훨씬 큰 역인 가고시마츄오역으로 갈 수도 있었다. 어차피 미야자키까지 타야 하는 특급 키리시마는 그곳에서 출발하는 기차다. 하지만 가고시마역이 더 작고 오래된 역사로 보였고, 그곳까지 걸어가는 길의 풍경이 좋을 것 같아서 이쪽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기분 좋게 맞아떨어졌다.
평소에 아침을 먹는 편이 아닌데 여행 중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에 배가 고파졌다. 하지만 곧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라 간식이나 도시락을 살 수 없었다. 그래, 12시 좀 넘으면 미야자키에 도착할 거야. 새로운 도시에서 점심을 먹자!
플랫폼에서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기차가 들어온다. JR 특급 키리시마(きりしま). 가고시마츄오역에서 미야자키역까지 운행하는 열차다. 일본에서 특급 열차는 신칸센의 바로 아래 등급이다. 그 아래로 쾌속 열차와 일반 열차가 있다. 우리의 등급으로 말하면 새마을호와 비슷한 등급일까?
열차 내부는 넓고 쾌적한 편이었다. 가고시마 시내를 벗어나서 조금 더 달리자 오른편에 가고시마만(鹿児島湾)이 나타났다. 맑은 날이라면 멋진 경치를 보여줬을 텐데 태풍 때문인지 바다가 온통 흙빛이다. 어느새 이런 풍경이 익숙하다. 지난 21호 태풍 란 덕분에 시마바라(島原)에서 구마모토(熊本)까지 배를 타지 못하고 기차를 탔을 때, 아리아케해(有明海)의 파도도 저런 흙빛이었다. 한 번의 여행에 두 개의 태풍이라니. 일본에 태풍이 잦은 건지, 내가 운이 안 좋은 건지 모르겠다.
두 시간이 넘게 기차를 타고 바다 옆을 달리고 산을 넘어 드디어 미야자키 역(宮崎駅)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는 그저 흐린 정도의 하늘이었고, 기차를 타고나서야 빗방울을 뿌리더니, 미야자키에 도착하니 꽤 굵은 빗방울을 뿌리고 있었다. 거기에 싸늘한 바람까지 더해져서 으슬으슬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배도 고프고 몸이 떨릴 정도로 추위를 느끼고 있자니 어서 따끈한 국물로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미야자키역에서 가까운 라멘집을 검색했다. 야마고야(山小屋)라는 라멘집이 근처에 있었다. 후기나 평가 같은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가깝다는 이유로 선택한 집이었는데, 어라? 비주얼이랑 다르게 의외로 맛있다. 국물이 좀 연하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먹기 편하다는 장점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하카타식의 얇은 면이 마음에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몸이 좀 따뜻해졌다. 미야자키역 바로 앞에 있는 토요코인(東横INN宮崎駅前)을 예약해두었다. 오늘 태풍이 미야자키를 관통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역에서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는 것이 편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라멘을 먹고 호텔에 들러 체크인을 하려고 했지만, 아직 체크인 시간이 아니라서 불가능하다는 답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미야자키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어딘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있겠지.
다행히 역사 안에는 KEN&MICHI라는 카페가 있었다. 커피 한 잔과 스트로베리 숏케잌을 주문했다. 뭐랄까, 일본에서는 카페에 들르면 '아저씨처럼' 스트로베리 숏케잌을 시키는 편이다. 역시 '아저씨처럼'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먹는 것도 좋아한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것도 아닌데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걸까...
호텔에 체크인한 다음 주위에 뭐가 있는지 지도를 좀 살펴봤다. 비가 오고 있고, 언제 바람이 더 강해질지 모르는 날씨니까 멀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호텔 방 안에만 처박혀 있기에는 시간이 좀 아까웠다. 마침 가까운 곳에 미야자키 과학기술관(宮崎科学技術館)이라는 곳이 있다.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입장료를 내야 하는 것이 아쉽지만, 실내를 구경하는 곳이니까 비를 맞을 걱정도 할 필요가 없는 곳.
같은 이유였을까?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과학기술관은 말 그대로 어린이들의 체험학습장 같은 곳이었다. 내 눈에는 좀 조잡해 보이는 것들이었지만 아이들이 보면 신기해하거나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오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플라네타리움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 과학기술관에 있다는 정보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입장료에 약 200엔 정도를 추가하면 플라네타리움을 볼 수 있다. 꽤 다양한 상영물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에 상영한 것은 일본의 건국 신화와 관련된 영상이었다.
헌데 그 영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본영상을 틀어주기 전에 '오늘 미야자키의 하늘입니다'라고 하면서 주위의 풍경과 함께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쫙 뿌려주는데, 엄청나게 거대한 돔 천장에 별들이 가득 찬 장면은 기억에 남을 정도의 장관이었다. 검색해보니 국내에도 몇 군데의 플라네타리움이 있는 것 같은데, 언제 한번 가봐야겠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드라마나 영화에 플라네타리움이 나오는 장면은 별로 본 기억이 없는데, 일본의 만화나 드라마에서는 플라네타리움이 나오는 장면이 유난히 많았던 기억이다.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빗방울이 계속해서 굵어지고 있고 바람 소리도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호텔에서 저녁을 해결해야 할 분위기.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도시락을 사갈까? 싶어서 미야자키 역사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미야자키규 도시락을 파는 헤이케노사토(平家の郷)라는 가게를 발견했다. 매장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도시락을 주문하고 받을 수 있도록 별도의 창구가 있길래 가까이 가서 가격을 살펴보니... 역시 미야자키규. 도시락일 뿐인데도 2,000엔이다(정확하게는 1,980엔). 가게 앞을 서성이며 계속 고민했다. 도시락을 사는데 2만 원을 쓴다고? 그래도 미야자키에 왔는데 미야자키 소고기를 안 먹을 거야? 그건 내일 괜찮은 가게를 찾아서 직접 구워 먹으면 되잖아. 그럼 오늘 저녁은 뭘 먹으려고? 편의점에 있는 그 뻔한 도시락들?
결국, 미야자키 쿠로게와규 서로인 스테이크 벤토(宮崎黒毛和牛サーロインステーキ弁当)라는 엄청나게 긴 이름의, 하지만 사실 별 뜻은 없는 도시락을 주문했다. 미야자키의 소고기 중에서 윗등심 스테이크로 만든 도시락이라는 뜻일 뿐.
주문한 다음 10~20분 정도 기다리면 도시락이 나오는 시스템이라서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니혼슈를 샀다. 도시락을 받은 다음 비싼 도시락이 식을까 걱정하며 호텔로 돌아와 도시락을 먹는데...
2만 원이 절대로 싼 가격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도시락인데... 엄청나게 맛있었다. 부지런히 서두른답시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방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느라 식어버린 도시락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규는 달랐다. 절대로 2만 원이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내일은 좋은 가게를 찾아서 제대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헤이케노사토(平家の郷)라는 가게는 미야자키에만 4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고 도쿄에도 4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는 꽤 큰 규모의 미야자키규 체인점이었다.
어쨌거나, 기분 좋은 저녁을 먹고 나서 침대에 누웠는데 엄청난 바람이 분다. 창문이 부서지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엄청난 바람이다. 정말 태풍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 소리로 느껴진다.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는 있는 거겠지? 도저히 잠이 오질 않는다. 결국 넷플릭스를 켜서 기묘한 이야기 시즌 2를 모조리 시청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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