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오늘, 바로 오늘! 미야자키 신궁대제가 열리는 날이라는 소식을 알게 됐다. 네 시 즈음이면 미야자키 신궁 앞길에서 축제 행렬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정보도 입수했다. 남은 시간을 보내느라 평화의 탑(平和の塔))을 구경하러 갔는데, 의외로 거리가 멀어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헤이와다이 공원(平和台公園)에서 미야자키 신궁(宮崎神宮)으로 돌아오는 데는 30분이 훌쩍 넘게 걸렸다. 오르막을 올라가느라 힘을 다 썼기 때문일까? 어쨌든, 생각보다 멀리 다녀왔고,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덕분에 행렬의 시작을 놓치고야 말았다.
신궁 근처에서부터 느껴졌다. 사람들의 물결(?)이 미야자키 신궁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행렬이 지나가는 대로변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있었다.
미야자키 신궁대제(宮崎神宮大祭)는 매년 10월 마지막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린다고 한다. 토요일에는 신궁에서 행렬이 출발하고, 일요일에는 신궁으로 돌아오는데, 오늘은 일요일이니 축제를 마치고 신궁으로 돌아오는 행렬인 것이다.
행렬 가운데 일본의 전통 결혼식 복장을 한 신부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는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샨샨우마(しゃんしゃん馬)라고 해서 오래된 예전부터 결혼하기 전에 신부를 태우고 신궁에 참배하러 가는 말이라고 한다.
미야자키 신궁대제를 그 지역에서는 진무(神武)라고 부른다고 한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친근하게 부르기 위해서 사마(님)나 상(씨)을 붙여서 진무사마 또는 진무상이라고 의인화해서 부를 정도라고 하니 미야자키 지역의 사람들이 이 축제를 대단히 좋아한다는 것은 사실인가보다.
행렬 중 가장 큰 박수를 받았던 것은 커다란 깃발이었다. 정확하게 어디의 깃발인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큰 박수를 받은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커다란 깃발을 덩치 좋은 남성 혼자서 들고 옆에서 그걸 도와주는 사람이 두세 명 있는데, 깃발이 너무 크다 보니 똑바로 세운 채로 전깃줄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깃줄을 만날 때마다 깃발을 옆으로 눕혀서 통과해야 하는데, 누가 봐도 힘들어 보이는 장면이었고, 기수의 표정 또한 '나 지금 엄청난 힘을 쓰고 있는 거야!'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큰 깃발이 전깃줄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관객들이 손뼉을 쳤고, 마치 그 장면은 축제 행렬이라기보다는 진기명기를 보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일본에서 마쯔리(축제)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꽉 찬다고 말해도 될 만큼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에서 동시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것을 본 건 12월 31일에 신년 카운트 다운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행렬에 참여한 팀들은 말 그대로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 대부분이라고 느껴졌다. 중학교, 고등학교, 상인회, 미인대회 수상자 등등 수십 개의 팀으로 이루어진 행렬이 모두 지나가는 데에 30분이 훨씬 넘게 걸릴 정도로 기나긴 행렬.
모인 사람들은 많았는데 의외로 '들뜬' 분위기가 아니라서 놀랐다. 사람들은 차분하게 축제 행렬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용히 손뼉 치고, 조용히 사진 찍고. 내가 생각했던 축제의 모습이 아니었다. 행렬이 모두 지나가고 나면 여전히 차량을 통제하고 보행자 천국이 되어 각종 이벤트를 한다고 하는데, 그걸 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축제 행렬이 모두 지나간 다음 버스를 타고 숙소 근처의 번화가로 돌아왔다. 이제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오늘 저녁은 당연히 미야자키 규(宮崎牛)를 먹을 계획이었다. 구글맵에서 검색해본 가게 몇 군데를 가봤는데...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비싸거나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매우 한국스럽게 불판에 고기를 구워 먹고 싶었다.
결국 뒷골목의 허름한 가게를 하나 찾아냈다. 이름은 만리끼(万力).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니 가격이 너무 착하다. 이거 정말 미야자키 규 맞아? 이렇게까지 저렴할 수가 있나? 게다가 야채와 샐러드는 무료라고???
일단 미야자키규 특상 갈비(宮崎牛特上カルビ) A5 등급을 주문했다. 참고로 A5 등급은 우리나라로 치면 1++ 등급 정도 되는 가장 높은 등급인데, A5 등급 안에서도 세분된 구분이 있긴 하다. 사진으로만 보기에는 A5 등급에서는 가장 낮은 No. 8 정도가 되지 않나 싶다.
주문한 고기를 받아 보고는 가격이 저렴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방 제거가 충분하지 않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냉동육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꽝꽝 언 고기가 나오는 건 아니고 충분히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만큼 해동이 되어 나오니까 저렴하게 미야자키 규를 맛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은 맞았다.
입이 짧아서 별로 많이 먹지는 못하니 미야자키 규와 일반 소고기를 비교하기 위해서 일반 갈비(カルビ)도 주문했다. 같은 부위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확연히 차이가 났다. 만약 한 접시를 더 먹을 수 있었다면 당연히 미야자키 규 특상 로스를 주문했을 거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굳이 대창(牛ホルモン)을 먹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갑자기 대창이 땡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창과 갈비보다는 당연하게도 미야자키 규가 맛있었다. 냉동육인데도 말이다. 야채가 무료인 것도 아주 매력적이고, 가게의 분위기가 허름하면서도 정감가는 곳이라 저렴하게 고기를 구워 먹기에 제격인 곳인데... 뭐랄까, '미야자키 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하면서도 엄청난 기대 때문이었는지 조금 실망했다. 저렴한 냉동육을 먹고서 실망이니 어쩌니 말하는 게 좀 우습기도 해서, 언젠가 다시 미야자키 규를 먹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아마, 이제 그럴 기회는 없겠지만.
고기로 배를 채우고 나니 하이볼이 마시고 싶어졌다. 몇 군데 바를 검색해봤는데, 아직은 오픈할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좀 때워야겠으니... 조용한 가게를 찾아서 가벼운 안주에 소츄를 마셔볼까 싶었다. 그렇게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돈돈(呑どん)이라는 가게를 찾았다. 심지어 구글맵에서 검색도 안 되는 곳. 그래서 그냥 주소로 링크를 해뒀다.
자리에 앉자마자 소츄를 로꾸(ロック)로 주문했다. 그러고는 메뉴판을 보다가 네기(파)와 야끼도리(닭꼬치)를 주문했는데... 어라? 소츄와 함께 나온 오토시가 너무 거하다. 이곳이 미야자키(宮崎)이기 때문일까? 역시 축산의 도시. 특히 닭과 소가 유명한 곳. 미야자키의 소고기와 미야자키의 닭고기는 일본에서 최고로 치는 소와 닭이다. 그래서인지 오토시로 닭고기 조림이 나오다니. 난 이미 배가 부르고, 가볍게 먹고 싶어서 들어왔는데...
잠시 후 주문한 야끼도리가 나왔는데... 어허, 이것 또한 양이 엄청나다. 그리고 이것저것 맛을 보니.. 아하, 이 가게는 저렴하고 푸짐한 것이 무기인 가게구나. 분위기는 조용하고 허름하면서 정겨운 분위기인데, 음식은 내 스타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별로 입에 맞지 않는 이자카야에서 가볍게 시간을 때우고 나니 바들이 문을 여는 시간이 됐다. 보통의 경우 바들은 오후 8시 이후에 문을 연다. 다시 말해서 나는 8시도 되기 전에 저녁을 먹고, 2차를 다녀왔으니 8시 즈음에는 3차를 간다는 얘기다. 혼자서...
검색과 발품을 더해서 찾아낸 가게는 산토리 SHORT BAR 4665. 가게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런 분위기는 좋은 곳이다 싶은 곳. 그래서 자리에 앉자마자 하이볼이 아니라 김렛을 주문했다. 칵테일 실력을 좀 보고 싶었다. 평범한 잔에 나온 김렛의 맛은 평범했다.
평범한 김렛을 마시면서 메뉴판을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가격이 너무 저렴했다. 특히 고숙성 위스키의 가격이 심각하게 저렴했다. 요즘 일본 위스키의 가격은 말도 안 되게 올라서 감히 마실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인데, 이렇게 저렴한 가격이라니(3년 전이라는 걸 고려해도 저렴하다. 당시에도 이미 일본 위스키는 가격이 엄청나게 오른 상태였으니).
오랜만에 하큐슈(白州) 하이볼을 한 잔 마셨다. 하이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하이볼이다. 감히 하큐슈를 하이볼로 마시는 낭비를 하느냐면서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하큐슈는 하이볼이 더 어울리는 술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하이볼을 홀짝이며 내일의 스케줄을 생각해본다. 오늘은 10월 29일. 내일은 생일. 그렇다. 내 생일이다. 여행 중에 맞이하는 생일이라 축하해줄 사람이 없는 생일. 그렇다면 스스로 축하해줘야 하는 걸까? 오늘 밤처럼 내일 밤도 혼자 바에서 하이볼을 마시고 있으면, 왜인지 모르게 초라하고 외로운 느낌이 들지는 않을까? 여행 중이니까 나에게 선물을 해주는 건 어때? 좋은 숙소에 묵고, 좋은 식사를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몸'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여행을 떠나온 지 2주가 넘어 20일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한 번 푹~ 쉬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RELUX를 열었다. 일본의 고급 호텔과 료칸을 예약할 수 있는 앱이다. 비용을 좀 쓰더라도 괜찮은 숙소에 묵고 싶을 때 가끔 이 앱을 쓴다.
오이타(大分), 벳푸(別府), 유후인(由布院) 쪽의 온천 료칸들을 검색해봤다. 내일 당장 묵을 곳을 찾아야 하고 심지어 혼자 묵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하다 보니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결국 유후인에 숙소를 하나 잡았다. 그렇다는 얘기는 내일 유후인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거다. 교통편을 확인해보니 이런저런 문제가 좀 있어서 엄청나게 오래 걸릴 상황이다. 뭐, 어떤가. 내일 나에게 주는 선물은 온천 료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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