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며칠 전부터 친구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 한 달 넘게 일본을 돌아다닌다고 하니 각자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는 들르지 않는 거냐며 보고 싶다고 하는데... 한 명은 오사카(大阪), 한 명은 도쿄(東京). 원래 나의 계획은 큐슈(九州)와 시코쿠(四国)였으니 전혀 다른 동네. 게다가 교통비가 꽤 나오는, 거리가 먼 곳들이라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는 건 무리...
결국 시코쿠 일정을 포기하고 오사카를 거쳐 도쿄로 올라갔다가, 도쿄에서 귀국하는 걸로 계획을 변경했다. 덕분에 히로시마(広島)에 들러 미야지마(宮島)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바로 모지코(門司港) 다음 일정은 시코쿠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을 거다.
미야지마에서 오사카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전에 섬에서 빠져나왔다. 입도할 때의 역순. 미야지마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뭍으로 나와 미야지마구치역에서 일반 기차를 타고 히로시마역까지 이동. 배 타는 시간은 10분 정도, 기차는 30분 정도 걸린다.
히로시마역에서 신오사카역까지는 신칸센으로 1시간 30분 정도.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다. KTX로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는 것보다 조금 더 가까운 정도랄까. 이렇게 금방 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미야지마를 두세 시간 더 구경하고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점심시간이 조금 넘은 시각, 드디어 신오사카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계획이 완전히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시코쿠는 포기. 새로운 일정을 짜야 한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관계로 아직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았다. 이번 숙소는 에어 비앤비를 이용한 신오사카역 근처의 오피스텔(비슷한 어떤 것). 가까운 카페를 하나 찾았다. 가벼운 끼니 + 커피 그리고 체크인 시간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적.
숙소에 체크인하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알게 모르게 게스트하우스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있나 보다. 아무래도 다른 손님들을 신경 써야 하니까. 어차피 오사카에는 관광을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니까... 한숨 푹 자자!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 일어났다. 무엇을 먹어야 할까. 갑자기 떠오른 것은 오코노미야키(お好み焼き). 개인적으로 히로시마식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왠지 오사카! 라고 하면 오코노미야키가 떠오른다.
타베로그와 구글맵을 함께 이용해서 찾은, 숙소 근처의 오코노미야키 가게 슈게츠(秀月). 지도를 보고 찾아갔는데 입구가 워낙 작고 눈에 잘 띄지 않아서 옆집에 들어갈 뻔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바로 이 가게는 마음에 들었다.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이 낡고 허름한 분위기와 퇴근하고 가볍게 한잔하러 들른 것 같은 사람들. 손때가 묻었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집기들. 집 근처에 있었다면 단골각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바로 오유와리(お湯割り)를 한 잔 주문했다. 따끈한 소츄를 한 잔 마시면서 메뉴를 살펴보다가 결국 주문한 것은 돼지고기 오코노미야키.
운 좋게(?) 철판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손님들이 주문한 모든 요리의 준비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 일단 기본으로 양배추와 계란 물(?)을 올린 다음 서서히 익어감에 따라 각자 다른 재료들이 토핑으로 올라간다. 마지막에 소스들을 뿌리면 완성. 작은 뒤집개처럼 생긴 철 주걱(?)으로 마음에 드는 만큼씩 잘라서 먹으면 된다.
다시 한번, 이 가게의 이름은 슈게츠(秀月). 방문 당시 아슬아슬하게 만석 전에 앉을 수 있었다. 허름한 가게 분위기와는 다르게 꽤 정갈한 가게 홈페이지도 있다. 혹시 주변에서 유명한 가게일지도?
오코노미야끼로 저녁을 해결하고 있자니 퇴근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히가시미쿠니역(東三国駅)에서 만나 친구가 이끄는 대로 작은 사케바를 찾아 들어갔다. 나중에 검색해서 찾아보니 가게 이름은 지자케야 아쿠비(地酒屋あくび). 지자케(地酒)란 지역별 술을 말한다. 지비루(地ビール)가 지역 맥주였던 것과 같은 맥락의 이름. 끝에 야(屋)가 붙으면 가게라는 뜻이니까 전국 각 지역의 술을 파는 가게라는 뜻이다.
첫 주문은 가볍게 니혼슈 한 홉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가벼운 안주와 함께 술을 마시며 친구와 회포를 풀고 있는데,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마스터가 눈치챘다. 어떤 술을 좋아하냐고 물어보길래 보리소츄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무뚝뚝한 마스터가 조용히 꺼내온 술 세 병. 꽤 괜찮은 보리소츄인데 한번 마셔보라고 한다.
마스터가 추천해준 소츄는 총 세 종류. 모두 무레즈루(牟禮鶴)의 소츄였다.
좌측의 노란 레이블은 무레즈루 오시키(牟禮鶴 黄鐘). 상압증류 방식을 사용한 25도의 보리소츄. 오시키(黄鐘)는 일본의 전통음계에서 8번째 음을 말하는 것이라는데 서양음악에서는 라에 해당한다고 한다. 시음해 본 느낌은 좀 거친 알콜의 향 때문에 보리의 향을 확실하게 맡기가 힘들었다. 전반적으로 깔끔했지만 뭔가 좀 아쉬운 느낌.
가운데의 녹색 레이블은 무레드루 이치코츠(牟禮鶴 壱越). 감암증류 방식을 사용한 25도의 보리소츄. 감암증류란 압력을 낮춰서 더 낮은 온도에서 증류하는 방식을 말한다는데, 어쨌거나 향이 좀 더 풍성해진 느낌. 이치코츠(壱越)는 일본의 전통음계에서 첫 번째 음을 말하고, 서양음악의 레에 해당한다고. 술 이름에 전통 음악의 음계 명을 붙인 것이 재밌다.
우측의 아이보리색 레이블은 몬 무레즈루(聞 牟禮鶴). 역시 감암증류 방식을 사용한 25도의 보리소츄인데, 해당 증류소의 최고급 라인이다. 토요노호시라는 신품종 보리를 100% 사용했다고 하는데, 레이블에 코가 그려진 것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향이 피어오르는 좋은 술이다. 물론 전반적인 완성도 자체도 훨씬 높고 밸런스도 훌륭한 소츄였다.
친구 덕분에 좋은 소츄도 마시면서 이후의 일정에 관해서 얘기를 해봤다. 바로 내일! 내일은 차를 하나 렌트해서 같이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일정을 모두 친구에게 일임했다. 와카야마라는 동네로 내려간다고 한다. 그러니 오늘은 늦지 않은 시간까지, 간단하게만 마시고 헤어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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