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여섯 시간이나 이동했다. 미야자키(宮崎)에서 유후인(由布院)까지.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열차를 한 번만 갈아타면 되는 코스지만, 지진의 여파로 정상 운행하지 않는 구간이 있어 특급 열차 - 일반 열차 - 버스 - 일반 열차 - 특급 열차로 갈아타고서야 겨우 도착한 곳.
유후인은 처음이 아니다. 꽤 오래전에 친구들과 함께 여행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유후인에 가고 싶었다기보다 혼자서 갈 수 있는 적당한 온천 료칸을 찾다가 유후인에 있는 료칸이 마음에 들었던 것뿐이다. 이동 코스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노베오카, 오이타, 벳푸가 더 좋은 위치였는데, 하루 전에 급하게 예약하다 보니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유후인 번화가 바로 옆 골목에 위치한 료칸인 하나무라(はな村)는 괜찮아 보이는 석식을 포함할 수 있었고, 1인 예약도 받아주는 곳이었다. 의외로 1인 예약을 받아주지 않는 료칸들이 많다는 걸 이번에 검색하면서 알게 됐다. 숙소에 도착해보니 작지 않은 사이즈의 침대, 아마도 슈퍼 싱글이나 퀸사이즈 정도로 보이는 침대가 두 개 있고 티테이블도 제대로 갖춰진 큰 규모의 방이었다. 창밖으로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보였다. 욕실도 제대로 갖춰진 방이었지만, 계속 온천탕을 사용했기 때문에 욕실은 제대로 쓰지 않았다.
어쨌든 약 여섯 시간의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가장 먼저 온천탕으로. 체크인하면서 전세욕탕을 바로 쓸 수 있도록 예약했다. 아무래도 저녁 시간대에는 사람이 붐벼서 예약이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목욕 준비를 하고 전세욕탕으로 입장. 우선 실내 탕에서 몸을 깨끗하게 씻은 다음 야외 욕탕으로 나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아, 이 맛이지.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걸 느끼면서 따뜻한 물 안에 앉아 있는 기분.
온천으로 여독을 좀 풀고 작은 정원을 바라보며 잠깐 시간을 보냈다. 아직 저녁을 먹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는다. 유후인 거리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 오는 곳도 아닌 데 뭘. 오늘은 여기서 그냥 푹 쉬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작은 료칸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방으로 돌아와 준비된 다과 세트로 차를 내려 마셨다.
오후 여섯 시. 드디어 저녁 식사 시간. 식당으로 내려가니 작은 방으로 안내를 해준다. 바깥쪽에도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혼자 온 손님을 배려하기 위해 방을 준비해 준 걸까?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혼자서 생일을 맞이하고는 혼자서 저녁을 먹는 기분은... 마냥 즐거운 온천 여행객의 그것과는 달랐으니까.
사실 메뉴판이 온통 흘려 쓴 일본식 한자라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앞부분은 카타카나가 많아서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었고, 이 메뉴도 해석한 메뉴 중의 하나. 안내해주신 룸에 들어가니 먼저 세팅되어 있던 것이었다.
오늘의 쉐프 플레이트라고 메뉴에 적혀 있고, 각각의 이름은 연어 에스카베슈, 새우과 감자 크림치즈 미소, 토마토와 두부 타르트키슈 그라탕, 보리새우 춘권, 포르치니 버섯과 닭고기 테린.
커다란 접시 위에 작은 요리가 다섯 개 담겨 있는데, 각각의 이름은 엄청 길고도 복잡하다. 아주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질감으로 구성되어 입이 즐거운 요리였다. 아 참, 옆에 놓인 식전주는 향긋한 매실주.
다음으로 나온 요리는 오이타현에서 잡힌 세 가지 바다의 맛(魚三味). 회를 좋아하는지라 아주 마음에 들었던 요리였다. 구성은 카보스에 절인 히라메(광어)와 칸바치(잿방어), 아마에비(단새우) 그리고 입에서 살살 녹아버린 마구로 츄토로(참치 중뱃살)이었다. 금방 다 먹어 버려서 아쉬울 정도였는데, 실제로 식사가 다 끝난 다음 코스가 짧아서 아쉽다는 생각과 함께 사시미를 좀 더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마침 주문했던 니혼슈가 나왔다. 혼자 마시는 건데 커다란 병을 주문하는 것은 좀 눈치 보여서 작은 걸로 시켰는데, 이 작은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했다. 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몸이 피곤했던 걸까? 아니면 혼자 지내는 생일에 술을 거하게 마시고 싶지 않았던 걸까?
다음으로 두 가지의 국물 요리가 나왔는데, 하나는 맑은 탕이었고 하나는 걸쭉한 조림 같은 느낌. 메뉴판을 천천히 번역해보는데, 여기부터는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다. 중간중간 한두 글자를 알아볼 수 있지만, 전체를 읽을 수가 없으니 ㅠㅜ
어쨌든 기억과 당시에 남겨둔 메모를 기반으로 설명해보자면, 오른쪽의 맑은 탕 안에는 유바(두부를 만들 때 위에 뜨는 것)를 섞어 만든 어묵이 들어 있었고, 왼쪽의 걸쭉한 녀석은 호박으로 만든 요리였다. 호박의 향과 맛이 나다가 그 아래에는 쫀득한 모찌 같은 것이 느껴지고, 그 안에 대파의 흰 부분으로 소를 만들어 넣어 달지 않은 특이한 맛이었다.
고기와 버섯 그리고 채소가 담긴 접시를 가지고 들어와서는 옆에 놓여있던 불판 아래에 불을 붙여준다. 불판이 달궈진 다음 고기와 버섯을 올렸다. 메뉴에서 겨우 해석한 부분 중 하나. 흑모와규(黒毛和牛). 분명히 버섯도 어딘가 산지를 표시해놨을 텐데, 한자를 읽을 수가 없다.
다음 나온 것은 좀 특이한 메뉴였다. 도미와 광어를 이용한 파이. 유후다케와 킨린코를 표현한 것 같은 플레이팅이 솔직히 말해서 좀 촌스러웠다. 파이 안에는 생선 살을 다진 것과 야채가 함께 들어있었는데, 이름은 '파이'지만 오히려 중국 요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함께 나온 차완무시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계란찜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내용물이 잔뜩 들어 있어서 그동안 먹어본 것들과는 느낌이 다른 것이 좋았다.
다음 코스로 밥과 국이 들어와서 조금 놀랐다. 코스가 너무 짧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조금 더 먹을 수 있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너무 짜지 않은 쯔께모노가 마음에 들었고, 아주 진한 냄새가 나는 된장은 특별해 보였지만 살짝 거부감이 느껴졌다. 일본에서는 국을 먹을 때 그릇을 들고 마시는데, 그릇에 손잡이가 달려있으니 먹기는 편했다. 하지만 뭐랄까... 국그릇에 손잡이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디저트로는 하얀 푸딩이 나왔다. 위에 보이는 작은 그릇에는 흑설탕 시럽이 들어 있어서 그걸 하얀 푸딩 위에 뿌려서 먹었다. 달지 않으면서 깔끔하게 입을 씻어주는 느낌으로 식사를 마무리.
전반적으로 요리들이 깔끔했다. 중간에 도미와 광어를 이용한 파이는 너무 중식 같은 느낌이라 코스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좀 있었다는 것만 빼면 음식들이 좋았는데, 한두 가지 요리가 더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좀 짧은 느낌이다.
자, 저녁을 먹었으니 생일을 자축하는 축배를 들기 위해 근처에 있는 바를 찾아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것보다는 다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일단 온천탕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 생각해보자! 하고는 씻을 준비를 하고 온천탕으로. 낮에는 전세욕탕을 예약했었지만 이번엔 공용탕으로.
아무래도 손님들이 같이 이용하는 곳이다보니 서로의 신발이 헷갈릴 수 있는 곳이었는데, 탕 입구에 자기의 신발을 표시하는 글자 주머니가 놓여 있다. 자기 신발 위에 작은 글자를 올려두고 뭘 올려뒀는지 외우는 식. 나는 나의 성을 따라서 이(い)를 올려뒀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나오니 만사 귀찮아졌다. 별로 술을 더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고, 오늘이 내 생일인지 뭔지 그런 것도 다 잊었다. 벌써 여행을 떠나온 지 18일이 지났다. 그래, 이렇게 좋은 방에서 푹 쉬고 싶은 날도 있는 거다. 아마 그러라고 몸에서 술도 안 받아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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