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다

물건을 하나 사면 굉장히 오래 쓰는 편입니다. 옷은 닳아 해질 때까지 입고, 핸드폰은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때까지 씁니다(아이폰이 나오면 예외 상황이 되겠지만). 작은 물건들 하나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편이라 책상 서랍 여기저기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어지럽게 들어있어요.

그래서인지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열심히 고른 나의 물건에 대한 애정이나 집착같은 것도 있지만 '그것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럽기 때문입니다. 정신만 잘 챙기고 다닌다면 물건을 잃어버릴 일 같은 건 없잖아요.

3~4년 전에 추석 보너스를 받아서 큰맘 먹고 가장 큰 용량의 아이팟을 산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술마시고;;;) 버스에 두고 내렸어요. 내리자마자 아이팟이 없는 것을 눈치채고 택시를 타고 버스 종점으로 가서 새벽 5시까지 종점에 있는 모든 버스의 의자와 바닥을 샅샅이 뒤졌던 적이 있습니다. 뒤지는 내내 마음 속에 든 생각은 '이 한심한 놈아'였어요. 결국 찾지 못했고 그 여파는 자학이 되어서 한참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참 드러운 성격이지요.

지난 주말에 화천과 가평에 답사를 다녀왔어요. 광복절 연휴에 계곡 쪽으로 놀러가기로 했는데 어느 계곡이 좋을까, 그 동네 시설은 어떤가 눈으로 확인해야 했거든요. 금요일에 래프팅 간 친구와 포천에서 합류했습니다. 점심으로 이동 갈비를 먹고 화천 삼일 계곡을 둘러보고 가평으로 넘어오면서 명지산 계곡을 둘러봤습니다. 다들 좋더군요. 명지산 주변이 시설은 더 나아 보였고요. 비가 계속 내리긴 했지만 그렇게 답사 겸 드라이브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다가 옥수수를 하나 사기로 했습니다. 그 때 지갑을 꺼내려고 하는데... 어라? 지갑이 없는 겁니다.

그때부터 생난리가 시작됐습니다. 차 안을 샅샅이 뒤지고 빗속에서 트렁크를 열어보고 점심을 먹었던 갈비집에 전화를 했습니다(차에서 내린 적은 오로지 식당뿐이었어요). 어디에도 지갑은 없더군요. 드디어 자학이 시작됐습니다. '이 한심한 놈아. 그걸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냐.' 기분이 급우울해져서 창밖을 보고 말없이 서울로 향하고 있었지요.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집에서 안가져 나온 것은 아닐까?'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다가 책상 위에 지갑을 그냥 두고 나왔더군요. 친구들에게 구박을 들었습니다. 더 한심한 놈이 됐습니다. 그래도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잖아요;;;;

헌데 문득 잃어버리는 것이 나은 것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된 나쁜 버릇이나 마음을 아프게하는 나쁜 기억 같은 것들 말이죠. 빚이나 병같은 것도 잃어버리면 좋겠죠. 툴툴 다 잃어버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