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ters

계단에서 계단까지

zzoos 2007. 6. 2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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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계단을 오를 때마다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비가 올 것 같은 하늘과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 때문에 들고 나온 우산. 작은 가방은 담배와 지갑과 카메라로 만원. 결국 새로 산 무라카미 류의 [공항에서]는 우산과 겹쳐서 한 손에 들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핸드백으로 뒷모습을 가린 아가씨가 저만치 보인다. 항상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기이하다. 멋진 다리를 볼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게 불편하다면 긴 치마나 바지를 입는 것이 어떨까? 너무 오래 그쪽으로 시선이 고정되면 오해받을 수 있으니 얼른 시선을 돌린다. 계단 중간 즈음엔 항상 엎드려있는 아저씨가 보인다. 얼굴을 본 적은 없다. 원래는 군복이었을 것 같지만 시커멓게 때에 쩔어서 검은 외투가 되어버린 옷을 입고 있다. 그의 머리맡에 종이 상자가 놓여 있고 그 안엔 작은 은색 동전들. 난 한 번도 그 안에 동전을 떨궈 본 적이 없다. 계단을 다 올라오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약 3명 정도는 샌드위치맨처럼 가슴에 패널을 붙이고 약간은 뻘쭘한 표정으로 그 옆에 서 있다. 그 중 한 명의 가슴에 써진 문구를 유심히 읽었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하철역의 계단에서 사무실의 계단까지는 대략 8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거리.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과 반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서로 지나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지나다보니 이젠 얼굴이 익숙해진 사람들도 있지만 결코 인사를 하지는 않는다. 출근길. 그 시간은 다들 매우 바쁘고 급한, 시간에 쫓기는 시간이다. 물론 출근길이 아니라고 해도 인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점상들이 매우 많은 길이지만 이른 아침엔 토스트나 김밥을 파는 가게 외에는 별로 문을 열지 않는다. 공사 때문에 파헤쳐 놓았는지 약간 질퍽한 상태인 곳은 발을 디딜 때 조심해야 한다. 육교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엔 은행의 자동화 창구가...

챙그렁~

챙그렁? 무슨 소리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시선이 움직이다가 멈춘 곳은 발 밑. 반짝거리는 것이 구르고 있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것. 하지만 때가 좀 탔다. 크기는 5백원 동전 정도. 핸드백이나 가방 아니면 옷 같은 것의 장식었던 게 아닐까 싶다. 헌데 왜 그게 지금 챙그렁? 흡사 나의 구두 뒤축에서 흘러 나온 것만 같은 느낌.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차원문이 우연히 내 발 밑에 생긴 것 같은.

일상적이었던 출근길이 갑자기 픽션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걸을 때마다 발에서 다이아몬드가 쏟아지는 사람의 얘기를 써보면 어떨까. 아니 뒤축에서 다이아몬드가 떨어지는 구두에 대한 얘기가 좋겠다. 글의 분위기는 [벽을 통과하는 사람] 정도가 좋겠다. 판타지스러운 내용이지만 고전 소설같은 느낌. 그리고 배경은 현대나 미래 보다는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과거로 하자. 구두를 둘러싼 암투같은 것 보다는 우연히 그 구두를 얻게 된 한 남자(또는 여자)의 심리적인 변화와 생활의 변화 같은 것에 초점을 맞추자. 카메라를 너무 멀리 뺄 필요는 없다. 주인공의 일상에 밀착시키는 것이 좋겠다....

다시 계단. 가방에서 카드 지갑을 꺼낸다. 한 층을 올라오고, 철문을 열고, 카드 지갑을 벽에 달린 장치에 갖다 댄다. 띠리링. 철컥. 잠금 장치가 풀리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렇게 다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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