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을 써놓고 퇴근하다 보니 내 일상을 기록해놔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퇴근길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퇴근길. 사실 평소 퇴근할 때에는 회사 앞의 육교를 건너지 않지만, 위의 컷을 찍기 위해 일부러 육교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육교라는 것이 서울에 별로 남아있지않다보니 이런 컷을 찍기가 쉽지는 않죠.
양재역 4번 출구. 매일 아침 그리고 저녁. 두 번씩 지나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 곳이 4번 출구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네요. 아무런 생각없이 지나치는 곳. 새삼 얼마나 무심하게 살고 있었는지를 돌아봅니다.
퇴근길에 지하철을 타는 곳은 항상 2-3번 문입니다. 이곳에서 내려야 수서역에서 바로 계단을 올라갈 수 있거든요. 출근길엔 수서역 10-1. 퇴근길엔 양재역 2-3. 아마 지하철로 출퇴근하시는 분들은 모두 이런 번호들 외우고 있으실 거예요.
우연인지 필연인지 수서역에서 버스를 타러 나오는 출구도 4번 출구입니다. 저 멀리 예전에 사무실이 있던 현대벤처빌도 보이네요. 그 사이엔 이마트 간판도 보이고요. 가끔 퇴근할 때 들러서 와인을 사는 곳입니다.
3219. 흔들리는 버스 안. 버스가 다가오는 순간에 3219라는 번호를 찍고 싶었지만,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아서 버스 안의 컷으로 만족했습니다. 뒷태가 보이는 여성분이 꽤 예쁘게 생겼었어요. 사실 출퇴근할 때 (아무런 사건이 벌어지지 않아도) 예쁜 언니들을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특히 출근길에서 만나는 분들은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게 되죠.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친근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창 밖으로 흘러가는 장면들. 노래방. 한정식. 대도식당. 대도식당이 있는 걸보니 가락시장 옆을 지나고 있을 때였나 봅니다.
버스에서 내리면 송파경찰서 앞의 건널목을 건넙니다. 가끔은 왼쪽에 있는 골목에 들어가서 훼미리마트에서 담배를 사기도 하고요.
집 바로 앞에 오금역이 있지만 출퇴근길에 오금역을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5호선과 3호선은 종로에서야 만나거든요. 하지만 우연히 지나치는 출구가 또 다시 4번이길래 다시 한 컷. 그 뒤로 지하철 공사장도 보이네요. 언제 완공될지는 모르겠지만, 완공되고 나면 집에서 회사까지 버스나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고 한 방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정말 출퇴근이 편해지겠죠.
우체국 앞의 라일락을 찍고 싶었지만, 향기를 뿜어내던 라일락은 일부러 찾으려고 하니까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비밀번호를 누릅니다. 그러면 퇴근이 끝나죠.
매일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퇴근길. 하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남겨두니 기분이 다르네요. 매일매일 똑같다고 생각이 들지만 아마 매일매일 사진을 찍어보면 하루하루가 다르다는 걸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예전에 친구가 베란다에 삼각대와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하늘 사진을 찍었습니다. 필름 한 롤에 완전히 똑같은 하늘을 담았지요. 밀착 인화했던 그 필름에 담긴 하늘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하나 같은 하늘은 없었거든요.
우리 일상이 그렇겠죠. 매일매일 같은 날들이지만 실제로 똑같은 날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사진이라는 건 그런 걸 깨우치게 해주는 좋은 취미 중의 하나입니다. 속된 말로 '된장질'만 할 게 아니라, 제가 일부러 작고 휴대가 편한 카메라를 샀던 이유를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가끔 출사를 갈 때에는 일부러라도 필름을 써야겠습니다. 망원 렌즈로 한 화면 가득한, 풍부한 표정을 찍던 그 때가 그리워 지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