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찾아보는 편이다. 이번에는 제목이 그랬다. 퀸스 갬빗(Queen's gambit). 무슨 뜻인가 싶어 검색해보니, 유명한 체스의 오프닝 중 하나란다. 오프닝이란 체스의 초반 게임을 말하고, 바둑의 정석(定石)처럼 체스에도 수많은 오프닝이 있다는데, 그중에서도 퀸스 갬빗은 폰을 초반부터 희생하면서 포지션의 유리함을 얻으려 하는 오프닝이라고 한다. 솔직히 체스는 딱 '말 움직이는 방식' 정도만 아는 정도라서 더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체스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체스에 대해서 조금만 더 얘기해보자면, 이 드라마의 각 에피소드 제목은 모두 체스 용어인데 넷플릭스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제목은 체스 용어가 아니고 의역해두었다. 각 에피소드의 원래 제목은 아래와 같다. 어벤저스에서 번역 논란이 있었던 엔드 게임(Endgame)이라는 용어는 체스에서도 쓰는 용어였다.
- episode 1 : Openings / 체스 경기의 초반전. 퀸스 갬빗도 유명한 오프닝 방식의 하나.
- episode 2 : Exchanges / 말을 서로 교환하는 걸 말한다. 화이트 폰이 나이트를 지키고 있는데, 블랙 비숍이 나이트를 공격한다면, 폰이 결국 그 비숍을 따게 되고 화이트 나이트와 블랙 비숍은 서로 익스체인지한 것.
- episode 3 : Doubled Pawns / 폰이 세로로 두 개 겹친 형태. 뒤의 폰이 전진할 수 없기에 불리한 모양새.
- episode 4 : Middle Game / 체스 경기의 중반전.
- episode 5 : Fork / 한 번의 수로 두 개 이상의 기물을 동시에 공격하는 형태.
- episode 6 : Adjournment / 진행 중이던 경기를 나중에 다시 시작하기 위해 그대로 멈춰두는 것. 드라마 안에서도 나오지만, 다음 수를 두어야 하는 사람은 움직일 말을 미리 적어 봉투에 넣어둔다. 다시 경기가 재개될 때 심판이 봉투를 열어 해당 수를 체스판에 두면서 다시 경기가 재개된다.
- episode 7 : End Game / 체스 경기의 종반전.
자, 서두에 잡설이 길었다. 영화 아니 드라마에 대한 얘기는 짧게 하도록 해보자. 일단 나에게 이 영화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였다.
사실 퀸스 갬빗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다. 총 7개의 에피소드. 하지만 나는 자꾸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1화부터 7화까지의 에피소드들은 각각의 이야기가 아니고, 시즌 2에서 다른 얘기를 풀어갈 여지가 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쭉~ 달려서 찐하게 매듭을 지어버리는 완결된 이야기다. 일곱 개의 에피소드를 본 느낌이 아니라 조금 긴, 한 편의 영화를 본 느낌이 든다는 거다. 실제로 1화만 보고 자려는 마음을 먹었었는데, 어쩔 수 없이 7화까지 한 번에 모두 본 다음 아침 해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흡입력이 있는 이야기와 그 흐름 그리고 찝찝한 느낌을 남기지 않는 깔끔한 마무리까지 제대로 완결된 한 편의 드라마. 꽤 오랜만에 만난, 뒤가 구리지 않은 드라마다. 이것이 이 드라마의 첫 번째 매력이었다.
두 번째 매력은 주인공과 그 캐릭터다. 일단 안야 테일러 조이(Anya Taylor-Joy)의 매력이 화면에 가득 차고도 넘친다. 처음 봤을 때 젊은 시절의 뷰욕(Bjork)이 떠올랐는데, 어떤 장면에서는 배두나가 보이기도 했고, 다른 장면에선 나탈리 도머(Natalie Dormer)의 느낌까지. 보육원에서부터 세계 최정상의 체스 플레이어가 될 때까지 계속 변화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 드라마의 매력 중 하나다.
배우만이 아니라, 주인공 캐릭터 또한 매력적인데 그 이유는 역시 그녀의 결핍 때문이다. 베스 하먼은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보육원에서 지낸다. 당시 보육원에서는 아이들 관리를 위해 약물을 사용했는데, 그 약물의 영향인지 침대에 누워 환각으로 천장에 체스판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어린 나이에 체스 대회에 출전하고 우승하면서 돈을 벌게 되지만 술과 담배와도 빨리 친해지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의 후유증일까, 날카로운 승부의 세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일까. 술, 담배, 약물. 그녀는 정신적인 자극에 자꾸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어쨌든 그녀는 한발 한발 세계 최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중인데, 그 과정에서 자꾸 무너지고 어긋나는 그녀의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나약함에 대한 충분한 공감이 베스 하먼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살아있게 만든다. 자칫 최고의 체스 플레이어가 되는 천재 소녀의 성공기로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훨씬 입체적으로 만드는 장치는 그녀에 대한 충분한 서술이었던 것.
마지막으로 세 번째 매력은 다양한 영화적 장치들이다. 특히 60대의 음악과 패션은 화면 곳곳에서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드는데 거기에 드라마라기보다 영화 같은 화면 연출 기법들이 영상미를 더해준다. 마지막으로 딱 적절한 수준으로 사용한 컴퓨터 그래픽은 천장에 체스판을 그려 수를 읽고 있는 그녀의 표정과 함께 오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아마도 시즌 2는 없을 드라마일 거다. 어쩌면 영화를 찍으려고 하다가 도저히 2시간으로 줄일 수 없는 이야기라서 300분 정도로 충분히 설명하는 드라마의 방식으로 전환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 드라마다. 솔직히 말해서 좀 다른 방향으로 결말이 나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게 되는 드라마다(스포일러가 될까 봐 자세하게는 얘기를 못 하겠다).
분명한 건, 재밌는 드라마고, 몰입도가 높은 드라마고,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강력히 추천할 수 있는데, 다만 1편을 시작하면 약 5시간 동안 어드저먼트(Adjournment)할 수 없으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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